20211024일 일요일. 맑음


아침부터 휴천재 옆뜰이 소란하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그간 우리 집을 에워싸고 있던 황금색 잔디밭이 사라지는 중이다. 휴천재에서 바라보이는 앞산 지리산이 온통 우리 정원이지만 휴천재 바로 옆 구장네 논에는 봄철이면 모가 심어져 하늘하늘 휴천재의 풀밭이 되고 한여름에는 짙푸른 녹음으로 바람결에 물결치면서 잔디밭으로 여물어갔다. 그렇게 늘푸른 젊음으로 우리 곁에 늘 머물러주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논에 황금물결이 치면 추수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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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가 다 자라 이삭이 패고 드디어 그 생애 주기의 최고 정점에 오르면 노랗게 나락을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보스코의 이름 염()자는 ()가 생각()에 잠겨 이삭을 숙이고 골똘히 묵상하는 형상으로 곡식 익을 염()’이라 읽는다


휴천재 옆 구장네 논에서 어제 벼를 벴다. 뜨거운 태양과 거센 폭풍우 산들바람과 정겨운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하루하루 찰지게 커간 쌀알이 누렇게 익었고 콤바인이 논배미를 돌자 기계를 통과한 벼는 알곡과 볏단으로 가려져 볏단은 논에 눕고 낱알은 쌀푸대에 담겨 한남마을 기운 좋은 아낙의 팔에 번쩍번쩍 들려 트럭으로 옮겨져 쌓인다. 벼가 수일 내로 햅쌀로 빻아지고 그릇에 담겨 하얀 고봉으로 밥상에 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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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한길에도, 송문교 다리 위에도, 동네 고샅마다 검정색 그물망이 쭈욱 깔리고 훑어낸 벼가 거기 널린다. 허리가 기역자로 꺾인 아짐들(젊어야 70)이 고무래로 하루에도 몇 번씩 벼를 당그래질하여 덕석 위에 물결을 그려낸다


다리를 끌며 허리 펴기도 힘든 아짐들도 이 추수 때면 모두 천하장사가 된다. 추수의 기쁨에 젖어서리라. 평생을 땅을 주무르며 살고 그 땅이 시키는 일로 골병 들어 눕기까지 다 치뤄 내야만 어느 날에 땅으로 돌아가 앞 산 양지녘 영감 곁에 편히 눕는 게 산골 여인들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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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아래숯꾸지 논들은 한남마을 부부가 와서 콤바인을 운전해서 타작을 했다. 매해 봄가을로 두 번 보는 얼굴이지만 길에서 나를 만나면 반갑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남편은 콤바인을 운전하며 해 끄집아 내려(= 해 넘어간다구)! 날 어두우면 일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아내는 기계에 올라타 자루마다 쌀을 받고, 한 푸대가 차면 20kg짜리 쌀자루를 번쩍번쩍 들어 트럭에 싣는다. 부부가 정말 잘도 어우러져 가을 그림을 그려낸다.

휴천재 옆 논주인 강도형 구장(내 보기에 함양군에서 제일 부지런하고 제일 정성스러운 농사꾼이다)은 신이 나서 이것 농약 한번 안 준 아끼바리라! 누가 사 먹을지 복터진 기라!” 하며 자신의 농작물에 대한 긍지와 자랑에 흐뭇하다


벼 수확이 끝나고 기계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들판엔 갑자기 고요와 적막이 공간을 꽉 메운다. 모두들 수고했으니 이 겨울 편히들 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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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텃밭 배추 고랑을 돌며 나는 무름병으로 주저앉은 배추들을 들어냈다. 전국에서 배추농사가 3분의 1은 망쳐 올해 김장엔 배추값이 천정부지가 되리라는 걱정들이다. 자주 내린 가을 비에 아예 녹아버린 우리 텃밭 쪽파 이랑은 늙은 할미 머리카락처럼 하얗게 말라 늘어져 있다. 작년에는 대파 작은 한 단이 만원이었는데, 올해는 쪽파가 그 값비싼 자리를 꿰찼다. 이엘리가 쪽파 한 단에 만원 하기에 아연했다지만 우리 텃밭 쪽파 작황으로 보아도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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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산보 길에 돌아오면서 보니 문정식당 개집에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막 젖 떨어진 강아지 6마리가 심심하던 차에 반갑다고 꼬리가 떨어져라 휘두르며 우릴 열렬히 환영한다. 사람도 귀하고 개도 귀한 몸이 되신 마을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새끼 강아지를 알현하려 온다는 주인의 전언. 예전에는 강아지를 낳으면 바구니에 이고 장에 가서 돈으로 바꿔왔는데 요즘은 그 강아지 처리도 큰일이다. 시골임에도 개 키우는 집이 아주 드물고 닭우는 소리도 듣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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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요일. 미루는 시어머님 뵈러 서울 가고 우리만 가림정 미사에 참례했다. 늘 미루네와 함께 했는데,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대로 미루네가 없으니 허전하다. 신부님댁 강아지 복실이까지 행여나 미루네가 안 오나 미사시간 내내 귀를 쫑긋거리며 창문에서 서성거린다우리 원선호 신부님이 작곡하신 좋기도 좋을씨고 아기자기한지고오손도손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사는 것을 퇴장 성가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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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 한 형제라는 의미가 남다르게 맛나다'은빛나래단봉재언니가 요즘 많이 쇠약해져 우리를 안타깝게 했는데 부디 우리 여덟 명, 특히 어르신 셋(남해 형부, 보스코, 봉재 언니)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살다가 건강한 몸으로 하느님 나라로 직행들 하시길 기도한다미사 후 단성으로 나가서 뽕잎칼국수집에서 해물칼국수를 먹었는데 봉재 언니가 맛있게 드니 마음이 좀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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