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30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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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용히 소리도 없이 내린 비에도 휴천재 마당의 여린 장미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고 짧은 생의 미련을 내려놓는다붉은 잎들이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다모든 것이 때가 있다그게 언제 어떻게 내게 올지 모르는 것처럼장미의 아름다움이 흙 속으로 사라짐을 누구도 모른다. 이 겨레에게 한스러운 5월도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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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비가 왔다.  유노인네 논들도 구장네 논들도 논마다 물이 가득 채워지고 오늘은 하루 종일 한남 용환이 부부가 와서 이앙기로 구장네 논에 모를 심는다. 시골 살며 깊이 깨닫는 이치 하나! 농사는 하느님이 지으신다, 더구나 지리산처럼 천수답들은! 그리고 이앙기가 없다면 산골 벼농사는 다들 그만 두었을 게다. 쟁기질하고 물을 대고 써레질하고 모를 심던 남정들은 다 죽었고 안노인들만 살아 있으며, 조상대대로 부쳐왔을 밭들도 텃밭 아니면 모조리 묵정밭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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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비오는 동네길을 우산을 쓰고 보스코와 둘이 걸었다. 우리의 동네 한 바퀴는 최단 코스 산보이자 늘 갈 지(). 드물댁이 올부터 부치기로 한 어람댁네 밭엔 평소에 그미가 심고 싶었던 온갖 종류의 푸성귀들이 내리는 비에 신나게 자라고 있다. 고구마, 토란, 상추, 열무, 모두 캐 봤자 각기 한 솥 치도 안되니, 그저 재미로 심었나 보다.


임실댁네 막내아들이 비를 맞으며 논배미를 둘러보고 있다. 엄마는 아프고 자기는 멀리 있어 하는 수 없이 한남마을 용환이에게 논농사는 맡겼지만 땅에 대한 사랑까지는 남의 손에 못 넘겼나 보다. ‘초등학교 다니는 작은애가 대학만 들어가면 가까운 지역으로 직장을 옮겨 농사를 짓겠다’고 엄마에게 다짐했다니 임실댁이 자식들 중 하나는 건졌다.


화산댁 앞을 지나는데 늘 악다구리로 짖어대던 개 두 마리가 기척이 없다. 둘 다 사망신고를 했나? 아니면 동맹파업 중인가? 궁금해서 내가 그집 마당으로 들어가 비오는 날 개의 언어로 문안을 올렸다. '~월 월'. 검둥이가 '오늘은 모처럼 조용히 보내주려 했는데, 우릴 건드려?' 더러운 밀걸레 같은 털이 비에 젖어 앙상한 뼈가 다 내비치는 몰골로 '손님 대접차' 싸남을 한차레 떨고는 만사가 귀찮다는듯 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러고는 온 동네가 다시 적막! 둘이는 사람 안 사는 마을을 도는 기분이다. 용산댁이 요양원 들어간 뒤 돈대 높은 그 집은 몇 해 째 텅 비었고, 유노인집도 3년상을 앞두고 빈집이다. 맞은편 조합장님댁도 막내아들이 오면 방에 불이 켜지지만 늘 기척이 없다. 공소할메집은 그 큰 건물에서 20년째 90대 노인 혼자서 살아간다. 보스코만 보면 '선상님~'하며 반기던 옥구씨 집도 인적이 없다. 나머지도 모조리 안노인 1인 가구들. 무너져가는, 아니 자취없이 사라져가는 이 나라 농촌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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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비내리는 날 집에 가서 모처럼 책이나 봐야겠다. 지난번 표성음 작가가 준 학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읽었다. '경상남도 공동체 활동 지원 주민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주민의 개인사의 기록을 통해 마을의 역사와 자연, 인물과 사건, 문화유산 등을 채록하여 문서화하고, 작가들이 시 소설 희곡 등으로 다시 살려 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단다. 그럴듯한 문화활동이다.


우리 동네 아짐들만 해도 내 얘길 소설로 쓰면 열두 권도 더 될끼야.’ 라고들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은 남자들보다 여자들 욕구가 더 큰 듯하다. 정말 태고적부터 여자들은 이야기꾼으로 태어났다. 언어는 분명 여자들을 위한 창조물이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더구나 경상도 남자들의 폭압에서 누질러지며 살아남은 ()의 이야기가 구비구비 비오는 날 산골로 여울지는 물결처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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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거창세무서 함양출장소에 연말정산을 하러 가잔다최소한 십일조 만큼은 기부한다는 심경으로 이곳저곳 나눈 기부금 영수증들을 제대로 제출하면 연말정산에서 일부를 환급해주는데 그런 일에는 꼼꼼치 못한 마누라가 못 미더운 눈치여서 말없이 모시고 갔다세무서 직원들이 별로 친절할 듯하지 않은데보스코의 나이를 보고 말없이 도와주더란다오늘 읍내서 둘이서 먹은 칼국수 값이나 더 나올지 모르겠다.


오후에는 내 지나간 생일을 못 챙겼다면서 휴천농협 지점장이 직접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농협도 이젠 '찾아다니는 사업'을 하나 보다. 보스코는 내가 농민원부가 있는 여성농업인인 걸 새삼 안 듯, 자기가 여성농업인에게 얹혀사는 노인임을 깨달은 듯, 어제와 오늘 이틀째 배밭에 내려가 한나절씩 배를 솎는다. 소독 때를 놓쳐 잎마다 적성병(붉은별무늬병)이 깊어 올 배농사는 재미를 못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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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일하는 곁에서 나는 풀을 매면서 내가 농사지은 감자 둔덕을 손으로 더듬다 흙이 불룩하면 손가락을 쑤셔 감자알을 후벼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햇감자를 그렇게 캐내서 내일 산에 가져갈 빵에 넣을 감자 샐러드도 하고, 감자를 삶아 노릇노릇 다시 구워 둘이서 오붓한 저녁을 차리니 얼마나 오진지 모르겠다. 내가 농사짓는 일을 얼마나 흡족해 하는지 우리 농협 지점장님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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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스승 이우정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21주기이자 탄생 100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수유리 캠퍼스에 추모예배가 있었고 서울 사는 여동문들은 선생님이 좋아하시든 노래도 불러드렸다는데, 멀리 있다고 참석을 못해 선생님께 죄송하다. 내 생애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스승이시다. '선생님이 우리 가슴에 심어주신 기독교 장로회 정신, 기장성(基長性)을 간직하고 부끄럽지 않게 그분 가르침대로 살아가겠습니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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