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21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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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가 모심을 준비로 옆논들을 뒤집어놓으면 휴천재에도 황새가 돌아온다


금요일 아침휴천재 화단의 팔랑개비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열심히 돌아간다그렇다고 다섯 개가 한꺼번에 돌지는 않는다두더지영감 역시 짐 싸 들고 떠난 것 같지도 않다새로 심은 영산홍을 뿌리 밑으로 어찌나 쑤시고 돌아다녔는지 영산홍이 아예 흙 위로 밀려 올라 공중에 떠 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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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이웃집 도메니카에게 내가 자란(紫蘭)을 몇 뿌리 줬는데 우리 집 자란은 다 스러졌고 그 집 뜰에는 가득하기에 분양했던 내가 열 뿌리를 다시 얻어왔다여수 사는 양선생님이 몇 해 전 택배로 보내주신 분홍색 루드베키아도 소담정에 준 것은 잘도 번져 가는데 우리 마당에서는 말라 죽어간다


그럴 경우 그 주변 흙을 밟아보면 땅이 푹 꺼진다. 뿌리 밑으로 두더지가 통로를 파 놓아 뿌리들이 들떠 있다. 두더지굴 사이사이로 비가 흘러들어가 휴천재의 축대도 배가 불룩 나와 있다. 무슨 수가 없을까? 머리가 지끈거린다. 양선생님이 몇 해 전 휴천재까지 찾아와 심어주고 가신 덩굴장미는 잘 자랐고 며칠이면 핑크로 온통 담장을 꾸밀 참이다.


양선생님이 이번에는 루피너스를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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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랜만에 소담정 도메니카와 점심을 함께했다. 때로는 일주일에 한 번은 함께하니까 문정리 이웃에서 우리와 가장 식사를 자주 하는 친구였는데, 요즘 나의 잦은 서울 나들이로 좀 소원했다. 종합병원 간호과장 출신인 그미에게 우리도 아프면 늘 도움을 청하니, 이 산속에서 없어서 안 될 우리의 주치의(主治醫). 언제라도 부르면 달려와 주는 의료인이 이웃에 산다는 것은 도시에서도 흔치 않은 특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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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는 오랜만에 송전길 산보도 했다. 그만큼 날이 길어졌다. 사방에 찔레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찔레꽃 향기가 서러울 정도로 찬연한 숲길을 걷는다는 것은 지리산 삶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향락이다. 나무마다 풀마다 얼마나 정성껏 색다르고 생김새 다른 예쁜 꽃들을 크고 작게 피워 올려 이 봄의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벌레들에게 꿀과 꽃가루를 나눠주는 선심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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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눈을 뜨며 보스코에게 물었다 당신은 마당 축대에 기어오르는 환삼덩굴 사위질방, 노박덩굴 등을 쳐내고, 나는 식당채 곁 대나무 부근의 축대에 난 풀들을 낫질합시다. 아니면, 남호리 신선초 밭에 난 칡넝쿨을 걷어내고 과일나무 심은 부직포에 김을 매주기로 하던지.” 전날 조용한 가랑비가 종일 왔기에 무슨 일을 하든 풀 뽑기에 여건이 좋은 날이니 지심매기는 시골 생활에서 놓칠 수 없이 우선하는 작업이다


아무리 대단한 학자라도 꼭 필요한 노동 앞에서는 우선 순위가 달라진다. 그는 남호리 축대의 복분자도 쳐내야 하고 칡넝쿨도 캐내야 하니 그곳 일을 가자 한다. 그가 좋아하는 간식과 달달하고 시원한 커피 우유, 과일, 민트차를 챙긴다. 10시 경에는 꼭 간식을 해야 두뇌 공장이 돌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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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리에 심겨진 체리나무에 첫 열매가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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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리 밭은 얼마 전 경모씨가 예초기를 돌려주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처음에 밭 전체를 덮고 있던 칡넝쿨이 수년간 보이는 대로 낫질을 했더니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칡을 자르고 뿌리에다 '근사미' 약을 바르려고 했더니, 선험자의 조언이 약을 바를 필요도 없이 한 삼년만 보이는 대로 잘라내면 어느날인가 사라진다는 말이 맞았다.


신선초는 얼마나 기운이 좋은지 쑥이나 망추대도 그 숲에 자라 올랐다가는 맥없이 뽑힌다. 단지 아직도 애를 먹인 건 찔레와 미국자리공’. 요즘 보면 미국...’ 자가 붙은 것 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게 도통 없다


50그루의 호두나무를 심었는데 세 그루를 제외하고는 모두 살았다. 체리나무는 10그루 중 6그루가 살았고 그 중 하나는 올 첫 열매를 수줍게 맺었다세 그루의 밤나무도 꽃이 맺힌 걸 보니 올 가을에는 첫 수확 밤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3년 후면 저 많은 호두나무가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는데 열매따기를 누가 어찌할까 궁금하다. 딸들한테 몇 그루씩 분양해서 각자 자기 나무 열매를 수확하도록 꾀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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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57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 함양성당 본당의 날로 코로나 후에 거의 4년 만에 교우 전체가 병곡면에 있는 등구정으로 소풍 미사를 갔다. 마스크를 벗고 한껏 웃고 얘기하며 음식을 나누는 날이 드디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웃이, 더구나 신앙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나에게 혹시라도 코로나 병원균을 옮겨줄 미확정 환자가 아닌 일반 교우로 돌아온 것이다.


본당신부님은 강론에서 우리의 나날이 "우리 각자가 쓰는 사도행전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이젠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이겨내야 한다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제자들도 이제는 주님이 안 계셔도 '홀로서기'를 해야 할 게다. 그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부활하심을 보고 희망의 싹을 찾아냈던 사도들. 그 기억과 기쁨을 고이 간직하여 승천하셔도 이젠 성령님과 함께 홀로서기를 했고, 과연 모든 사도가 순교할 만큼(요한도 귀양 가서 죽었다) 맷집이 붙었으리라. 


우리 부모님 때부터 물려받아 4대째 내려가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보스코에게는 5대째)도 그렇게 성숙해가면 좋겠다. 야외미사와 푸짐한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 스.선생 부부와 함께 걷는 상림에는 봄바람이 선선하니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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