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2일 화요일. 맑음


월요일 아침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어젯밤 서울집에 들어오며 디딤돌 양옆으로 보이던 초록의 미확인 물체는 단언컨대 잡초였음에 틀림없다. 한 달 가까이 집을 고치며 그렇게나 짓밟았으면 대부분 식물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구박만 받아 온 잡초만은 모진 목숨을 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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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궁금해 사물을 구분할만큼 새벽빛이 보이는 시간에 마당에 내려갔다. 내 생각이 대부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그 거친 발걸음 밑에서도 둥굴레, 은방울꽃, 개미취, 범의 꼬리들은 밟히고 찢긴 채로 살아있었다. 다만 그것들보다 더 실하게 영역을 넓히는 잡초가 내 눈길을 사로잡아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게 했다.


오리궁둥이를 찾아 다리에 끼고 호미를 부지런히 놀린다. 잠을 덜 깬 잡초들의 원성이 귀에 들리지 않아 다행이지 엄청 억울했을 게다. 으아리는 나를 위로하느라 많은 꽃망울을 맺었다. 아침을 부지런히 먹고 나와 다시 주저앉아 1시까지 잡초를 두 삼태기나 캐냈다. ‘왜 잡초는 내 눈에만 보여 걔들과의 악연을 나만 쌓게 만들까?’ 나도 생각하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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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천이가 대대적인 집수리로 한 달 이사를 간다. "오늘 살림을 정리하며 누나 줄 냉장고와 식탁 의자를 제일 먼저 챙겨 보내겠다." 해서 시간을 어림잡아 저녁 7시 함양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는데, 냉장고와 식탁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때부터 냉장고를 들여놓고 조립을 하는데 시간이 급해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 일꾼들이 신발 신은 채 들어온 마루 청소도 해야 하고 먼젓 번 냉장고에서 꺼낸 음식물도 정리해 넣어야 한다. 우연히 2층 테라스에 나가보니 2층 난간에 올라온 인동초에 진딧물이 잔뜩 끼어 있다! 약도 쳐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위급한 순서, 내가 꼭 해야 할 순서대로 일을 한다. 아무튼 5시가 넘어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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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된 냉장고가 치워지고 5년된 냉장고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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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역에 도착하니 715분전. 너무 허기져 이대로는 지리산까지 못 가겠다.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 들고, '집 나와 갈 곳 없는 불쌍한 아줌마' 표정을 하고 대합실 한쪽 구석에서 꾸역꾸역 눈물의 빵을 삼킨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로(?)


71분 전 피곤한 몸을 함양 지리산 고속야간 버스에 짐짝처럼 싣는다. 잠은 쏟아지는데, 너무 피곤해 잠이 오지 않는다. 책이나 보자. 이렇게 12일 서울 여행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속도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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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가까워 휴천재에 도착하니 보스코가 '이산가족상봉' 표정으로 반긴다. 그도 이틀간 나 없는 사이에, 밭에서 겨울 난 상추를 뽑아내고 괭이로 파고 퇴비를 섞어 밭이랑을 만드느라 무지 힘들었다고 자랑이다. 축대 밑 배수로에 쌓일 대로 쌓인 진흙과 돌더미도 삽질해서 치우는 중이란다.


궁둥이를 두드려주고 수고했다고 칭찬을 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의 왼눈이 토끼처럼 발갛다. 나도 없는데 무지 힘들었나 보다, 실핏줄이 터지게. 사실은 한 달 전부터 왼눈을 자꾸 비비고 토끼눈이 된 것은 지난 금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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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 하나밖에 없는 함양안과로 서둘러 데려갔다. 예전엔 읍에 안과가 두 군데 있었는데 안과의사와 간호사가 사랑의 여행을 떠나버렸고, 오늘 가보니 바로 그 자리로 함양안과가 이사를 들어왔다. 시설도 서울 공안과만큼 갖추고 간호사 검사자들도 7,8명이나 된다! 부디 예쁜 간호사가 없어 의사쌤이 흔들리지 않기를... 이 병원마저 없어지면 안 되니까...


보스코가 내게 묻는다. “왜 여자가 아프면 혼자 병원엘 가는데, 남자가 아프면 여자가 꼭 보호자로 따라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당신이 설명을 못 하니까 내가 따라오지.” 언젠가 홍인외과에서는 환자는 교수님인데 왜 사모님이 다 대답해요?’라는 핀잔도 들었다


한 나무에서 어떻게 두 가지 색깔의 참꽃이 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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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병원에 기다리는 새에 나는 장에서 채소 모종을 사왔는데 그 새 진료가 끝나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 아무 말도 않고 그가 주는 안약 두 가지만 받아왔다. “왜 그간의 증세를 말 안 했어요?” “그땐 생각이 안나 설명을 못했지.” 내가 따라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든두 살 환자를 동반하는 일흔세 살 보호자 대부분 다 그렇다.


오늘 사온 모종을 심기 위해 보스코가 밭고랑을 마저 팠다. 그가 괭이로 파고 퇴비를 섞고 북을 돋으면 나는 밭 모양을 다듬어 멀칭해서 미스코리아 밭이랑을 만든다. 쪽파를 뽑아낸 이랑에는 드물댁이 모 부어 놓은 옥수수 모종을 옮겨 심고 물을 주었다. 멀칭 안 한 너른 이랑에는 루콜라, 상추, 쑥갓 아욱을 심었다. 채소 사이에 디기탈리스 꽃 세 줄도 심었다, 보스코 몰래. 나 혼자만의 아름다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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