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맑음
우리집 남자를 이해하는 데는 50년도 짧다. 쌍문동 뒷산 마지막 골목엔 몇 채 안 남은 단독 주택들이 있는데, 울타리 안에는 대부분 감나무 대추나무 꽃사과나무 한두 그루가 전부다. 그러나 터가 제법 되는 우리 집엔 큰 나무만도 열 그루는 자라고 있다.
나무들은 매해 무럭무럭 커서 잘라내지 않으면 밀림이 된다. 단감나무가 가지를 엄청 뻗어 주목도 덮고 으아리 덩쿨도 완전히 덮었다. 작년의 해거리(열 개도 안 열렸다)와 달리 금년에는 주렁주렁 많이도 열려 여러 사람이 나눠 먹고도 지리산에 실어갈 만큼 남았다.
모처럼 집에 온 빵기더러 단감나무 가지치기를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보스코가 잠시 사라졌다가 들어와서는 자기가 가지치기를 다 했다고, 아들더러 ‘너는 할 게 없다’고 한다. 마당 일에 그다지 열성이 없던 남자라서 아무래도 수상해 내가 나가보니 집안을 드나들며 사람 머리까지 닿는 잔가지 두어 개를 잘라 마당 구석에 던져 놓은 게 전부였다.
열을 받은 내가 톱을 들고 나가 굵은 가지 여닐곱 개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아들더러 처리하랬더니, 그 많은 가지를 하나로 꽁꽁 묶어서 나뭇단에 쏙 들어가 얼굴도 상체도 안 보이게 '나무사람'이 되어 내 앞에서 사라졌다. 50년 함께 산 남자의 속도 모르겠지만, 49년 알고 지낸 아들의 모습도 기상천외하다.
어제 서울집을 정리하고 새 차 아반테(큰딸이 우리집 '애마'라고 이름 붙였다)에 무언가 가득 싣고(서울 오갈 때마다 승용차를 '1톤 트럭'으로 둔갑시킨다는 게 보스코의 불평이다. 그래서 그의 눈칠 보느라 무거운 짐을 싣는 일도 거의 주부인 내가 혼자 한다.) 3시경 평택에 사는 막내 서방님 집으로 떠났다. 올해는 추석에도 서로 못 보았고, 나도 무릎이 아파 중간에 하룻밤 자고 가면 지리산행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막내동서는 언제나 하듯 정성껏 저녁상을 준비하고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막내 동서 얘기로는, 둘째 시숙(준이서방님)이 3년 전 세상 떠나고 이번에 큰 시숙이 큰 수술을 받자 맏형에 대한 자기 남편의 정이 한결 더 지극해지더 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기댈 곳 하나 없을 때 네 형제가 더 끈끈하게 이어졌고 맏형의 역할이 컸기에 나이 들어서도 보스코 형제들은 특별히 서로를 챙긴다.
나도 막내동서가 고맙고 이쁜 건 마찬가지다. 소심하고 지나치게 남을 챙기느라 자기 몫을 제대로 못 챙기는 서방님에 비해 동서는 너무 당당하고 씩씩하여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 돌보듯 서방님을 보살핀다. 그미도 나 못지 않은 '잔소리 왕'이지만 속 터지는 성씨 남자들과 살아본 여자들만 그 속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자기 남편이 잠시 아파 병원에 하루를 입퇴원하자 '살아서 숨쉬는 것만으로 고맙다. 다시는 잔소리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데, 그 결심이 딱 사흘 가더란다. 보스코처럼 훈이 서방님도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화도 안 내고 무슨 음악 소리 듣듯 빙긋이 웃기만 한다.
'남편이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초등학교 선생님이 사고를 치면 무슨 사고를 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는 늘 해결사로 살아야 하는 숙명'이라고 푸념하는 동서. 키가 커서(훈이 서방님보다 머리 하나가 크다) 늘 아픈 허리를 주체 못하면서도 자신만의 비법으로 요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동서 아니면 어떻게 오늘의 '성훈 교장선생님'(은퇴)이 있었겠는가! 인생은 오묘한 신비다.
보스코의, 젊은 엄마들과 함께 드리는 로사리오(영광의 신비 1)
오늘 아침 동서네 12층 아파트에서 내다보는 송탄벌의 해 뜨는 광경은 단독주택으로 땅에 붙어만 살아온 내게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서울집이 재개발되면 이럴 텐데...' 하면서도 아파트는 내게 영 익숙해질 수 없을 듯하다.
아침상도 동서가 걸게 차려냈다. 우리집도 엥겔지수가 높고 더구나 아침상은 하루에 제일 걸게 차려 먹긴 하지만 동서네 아침상은 그보다 훨씬 푸짐하다. 9시에 평택을 떠나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덕유산을 지났다. 산, 산, 산,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쉬엄쉬엄 구경하며 지리산에 도착하니 두 시가 넘었다. 보스코는 아내에게서 하사받은 '8주 유예'(수술 후 8주간은 집안일은 아무것도 안 시키겠다며 10월말까지는 집안청소와 설거지를 안 시키는, 아내로부터의 특전)를 만끽하는지 '화초서방님'('화초마님' 비슷한 말?)처럼 서재로 올라가 책상에 앉고 나는 아픈 다리를 끌면서, 아주 불쌍한 얼굴을 해가면서, 혼자서 '1톤 트럭 아반테'에 싣고 온 짐을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나니 두 주 만에 돌아온 휴천재의 하루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