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9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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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하지가 가까이 오면서 430분이면 밖이 환하고 새소리에 기분 좋게 눈을 뜨게 된다. 거실 창을 여니 간밤에 늦게까지 책을 보느라 불을 켜 두어서 창에 하루살이가 가득 붙어 있다가 아침이 되어 철수한 자국이 여간 눈에 거스르지 않는다. 한낮에 창을 닦으려면 요즘 같이 더운 날에 너무 힘들 일이다. 그릇에 비눗물을 풀어 들고 나가서 창닦이로 먼지와 여러 자욱을 지우고 유리 세정제를 뿌려 신문지로 싹싹 문질러 닦으면 하늘이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온다. 우리 집이 워낙 창이 많아서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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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안에서 새벽부터 자판기를 두드리며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하는 보스코는 내 창닦이 사진을 찍으면서 "처녀 하나 데려다 놓으니 애낳고 살림하고 집안청소에 창닦이까지 다해서 결혼이란 참 좋은거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수고한다는 칭찬인지 남자의 흐뭇한 본심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시키면 절대로 안 할 내가 하루 종일 휴천재를 오르내리며 방방 뛰는 여심 역시 까닭을 모르겠다. 


보스코는 배봉지 싸는 일을 빨리 끝내고 싶은지 아침식사가 끝나자 배밭으로 직행했다. 그를 위해 냉커피우유와 간식을 들고 내려가니 새참 먹는 재미로 배를 싼다나. 나는 신선초 부드러운 새싹을 한 줌 꺾어 나물을 해서 점심상에 올린다. 상추, 부추, 오이 등을 완전 자급자족하는 기분은 지리산에 사는 우리가 느끼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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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밭 옆에 신선초를 뽑아낸 자리에는 민트가 터를 잡고 남의 영토까지 넘본다. 휴천재 민트차는 향이 유난히 좋다며 반기는 친구들이 많아 장마  지기 전에 어서 베어 말려서 차를 만들 생각에 소쿠리 한가득 잘라왔다. 드물댁이 지나다 들어 오더니 다듬는 일을 거든다.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집 주변을 오르내리며 하시라도 날 도와줄 태세다. 너무나 고마운 아낙이다. 민트는 깨끗이 다듬고 씻어 보스코더러 묶어서 걸라고 했다.


토요일 아침 450. 민트를 마저 뜯으려면 동쪽에 있는 곳이라 해보다 더 부지런해야 한다. 내가 새벽녘에 나가려니까 보스코도 남은 배봉지를 마저 싸겠다고 따라나선다. 이 시간이면 구장이 논으로 올라오면서 자라는 벼를 향해 새벽인사 내지 일장훈시를 하곤 했는데 그의 목소리를 못 들으니 내 일상의 한 자락을 놓친 기분이다. 다만 주인은 떠나갔어도 남겨진 벼가 효성스런 아이들처럼 쑥쑥 잘 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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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를 큰 소쿠리 가득 뜯고 작은 소쿠리에는 이번 비에 잘 자란 부추를 채웠다. 전날 드물댁이 부추를 베다 놓으면 올라와서 다듬어 주겠다고 했기에 부추김치도 담그려는 내 속셈이었다. 그미는 나와 일을 하면서도 대등한 위치를 철저하게 챙긴다. 그미가 밭이랑을 매면 나는 고랑을 매고 그미가 땅을 파면 나는 골을 낸다. 그러니 부추를 다듬을 때도 내가 베어다 놓고 함께 다듬는다는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임실댁이 드물댁한테 씀바귀를 다듬으라고 시켜놓고 자기는 기름 짜러 화계에 가면 그냥 자리를 뜬단다. “내가 지 종이가? 쥔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앉자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게? 그래서 그냥 와 뿌렀다.” 나는 이런 그미의 오기가 사랑스럽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어도 잘사는 것들 하나도 안 불거워!” 하는 그 자세가, ''자 뒷다리도 모르지만 동네 허드렛일로 네 아이를 반듯하고 효성스럽게 키운 힘이다. 그미의 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나 안부전화를 걸어 엄마의 건강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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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부추를 다듬고 나서는 나더러 죽순을 캐러 가잔다. "원기댁 건너집 뒷쪽으로 대밭이 좋은데 올해는 가물어 죽순이 통 안 올라오다가 이번 비에 죽순도 행차를 시작했다. 원기댁은 걸을 수 없어 대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걱정만 하니 따다 먹어도 된다." 드물댁은 이렇게 마을 주변 나물 뜯을만한 곳을 다 안다. 어디 가면 쑥이 좋고, 냉이는 누구네 밭가에 많은지, 머우대는 어딜 가야 되는지('어람댁 논머리에도 있는데 그건 쳐다보지도 말라. 잘못하면 쥐어 뜯긴다'). 돌나물은 어디가 타는약(제초제)’ 안 친 곳인지, 돌미나리도 물이 깨끗한 곳 것을 먹어야 한다고 일러주며 날 데리고 다닌다. 그미가 뒤짐 짚고 배를 내밀고 설렁설렁 걸어다니는 것 같아도 다 나름 생각은 있다. 그래서 죽순을 한 자루 따왔고 점심상에 죽순골뱅이무침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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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금주 토요일에 빵고신부가 데려 온다는 10명의 피정팀 젊은이들을 위해 보스코가 이불 요 베개를 몽땅 테라스로 꺼내다 일광욕을 시킨다. 부창부수라 나는 이층 화장실 두 곳을 말끔히 청소하고 타페트 소파 쿳션들을 빨아 널었다. 미루던 냉장고 청소마저 끝내고 나니 완전 번아웃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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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본당신부님이 공소미사 오시는 셋째 주일이라 저녁 7시에 성체성혈 대축일 미사를 드릴 수 있어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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