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6일 목요일. 흐림


며칠 전 산보길에 보스코가 나이 들면 몸에 이상을 느낄 때 제일 먼저 체크할’ FAST를 일러주었다. F, 얼굴(face)을 살펴 떨리거나 웃는 표정이 이상하여 마비가 왔는지 체크한다. A, (arm)이 아프거나 잘 움직여지지지 않는지 본다. S, (speech)을 시켜보고 발음이 정확하거나 혀가 굳었나 살핀다. T, 한시간 반(time) 안에 병원에 가서 응급 처치를 해야 한다.


[크기변환]20220615_192432.jpg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이런 얘기에 영향을 받을까 싶다. 옛말에 모르면 약이다.” 어떤 친구 말대로 의사에게 절대 들키지 말라. 의사가 아는 순간 병이다.” 특히 우리 집에 정신이 육체에 직방으로 작용하는’(일명 '건강염려증') 한 남자가 있으니 나는 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그가 그제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다. 왼쪽 어깨가 살짝 아프다더니 생전 처음 혀가 말려드는듯 생각하는 단어가 잘 발음되지 않는단다. 이렇게 되면 내게는 비상이다. ‘경상대병원을 가야 하나?’ ‘남원의료원을 가나?’ 아니면 함양 홍인외과에 가서 1차 진료를 보고 소견서를 써서 큰 병원을 가야하나?’ 생각에 생각이 겹쳐 내 머리까지 깨지게 아프다.


언젠가 그가 서강대에 근무할 적 일이다. 강의하던 목소리가 잠기면서 어쩌면 목소리가 안 나올 수 있다는 동료교수의 말에 크게 놀란 적이 있었다. 어느 학생 수녀가 목 수술을 받았다는 강남의 어느 병원을 찾아가니 목에 폴립이 생겼다. 즉시 입원해서 수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를 잃는다. 이 병원에 환자가 밀려 당장 입원수속을 밟아라.”


그래도 철학교수답게 이 집에서 뭔가 너무 서두른다느끼고서 다시 오마고 나왔는데 이튿날 보스코를 데리고 여의도성모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이 나이에 교수님들의 목은 다 그래요. 목이 콱 잠겨 소리가 안 나오거든 다시 오세요.”였다. 지금까지 그의 목소리는 수술칼 안 대고도 잘 나온다.


[크기변환]20220615_192813.jpg


그래도 보호자 없이 혼자서 병원을 다 찾아다니며 고민했을 당시의 그를 생각하면 징그랍게 짠하다.’ 그래서 오늘은 조용히 타협을 보았다. 7월 중순에 보훈병원에 가서 MRI를 찍기로 했다. 오후에는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어 내 마음도 놓인다. 손이 많이 가는 남자’ 보스코는 마음도 많이 쓰이는 남자.


요즘은 해지는 시간에 산보하기가 기막히게 좋다. 선선하고 하지가 가까운 계절이라 밖도 적당히 환하고 모든 게 공짜인 신선하고 맛난 공기를 나도 실컷 들여 마시며 남편에게도 너무 맛나니까 많이 마시라고 권한다. 마치 잔칫상에 귀한 음식 가득 차려놓고 '어서 많이 드셔요' 하는 투다.


[크기변환]20220615_193226.jpg


엊저녁에는 저녁 산봇길에 그동안 우리 마을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무덤을 찾아보며 로사리오 기도를 했다. 마침 구장집 앞을 지나가는데 동호댁과 화산댁이 구장마누래 한남댁이랑 집앞에서 이바구들을 하고 있다. 남편이 있다면 다들 저녁 준비로 바쁠 시각이다. 누군가에 의해 통제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시간 앞에서도 왜 마음은 늘 먼저 보낸 이에 대한 죄스러움이 앞서는지 세 여인 다 어딘가 주눅 든 표정들이다. 더구나 ‘서방 옆에 끼고 살랑살랑 운동 나선’ 나를 보고서 부러움까지 역력하여 미안했다.


[크기변환]20220615_192636.jpg


구장 무덤은 작년에 돌아가신 유영감님 논 바로 위에 있다. 성묘차 찾아올라간 구장 묘석에는 구장 이름 아래 부인의 이름도 함께 미리 새겨 놓았다. 마치 "넌 살았어도 죽은 목숨이여"라는,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명시적인 표현 같다. 재작년 돌아가신 허영감 부인의 산소에도 허영감의 이름을 미리 새겼지만 테이프로 임시 가려 놓기는 했는데... 구장을 위해 로사리오 한 단을 바치고 내려왔다.


[크기변환]20220615_190511.jpg


아래숯꾸지 들어오는 옛날 길가에 (보스코를 만날 적마다 선상님!” 반기며 예의를 차린다며 지게를 내려놓고 보스코에게 말을 걸던) 옥구씨 산소 앞에서 로사리오를 한 단 바쳤다. 백연마을 쪽을 바라보며 유영감님 부부를 위해, 허영감 부인 우동댁을 위해, 휴천강 건너를 바라보며, 거기 누운 영숙씨 모친을 위해, 5년전 세상을 떠난 부면장을 위해 한 단 씩을 바치니 로사리오 다섯 단이 금방 동났다. 앞으로 넉넉 잡아 10년 후엔 안팎을 가리지 않고 지금 마을 사람 대부분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오늘 아침일찍 텃밭에 내려가 토마토, 오이, 가지에 지줏대를 보강하고 김원장님이 사다 준 고추 집게로 지줏대에 고정시켜 주었다. 보스코는 오전 내내 배봉지를 쌌다. 배가 워낙 많이 열리기도 했지만 솎기 아까워 남긴 배알이 워낙 많아 내일 하루 더 싸야만 배봉지 싸기가 끝날 거란다. 난 오후에 마실 온 드물댁과 함께 텃밭에서 꽃이 거의 다 진 파슬리, 아욱,상추, 근대를 뽑아내고 상추와 루콜라, 아욱, 옥수수를 새로 심었다. 하현 달이 될 때 씨를 심으라던 돈잔카를로 신부님을 생각한다. 그분은 하늘나라에서도 '부불쿠스'(농사꾼) 노릇을 하고 계실까? 어떻게 물어 봐야 될지 방법을 모르겠다.


[크기변환]20220616_061948.jpg


[크기변환]20220616_09421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