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4. 화요일


월요일 아침. 보스코는 배봉지를 싸겠다고 서두른다. “게으른 선비는 책장만 세고, 게으른 농부는 밭고랑만 센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의 경우에는 책장만 세던 선비가 해 떨어지자 바쁜 농부가 된다.’고 말함직하다. 그가 배농사에 그리 마음을 쓰는 게 나로서는 신기하면서 고맙다. 그가 학자이긴 하지만 시골에 사는 이상 농사일도 어디 하나에 마음을 붙인다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크기변환]20220613_104933.jpg


한겨울에 유튜브에서 배우는 학습대로 배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퇴비를 끌어다 나무 밑에 흩어준다. 3월부터 흑성병이나 적성병이 생기나 살피고 2, 3주에 한번씩 살균 소독을 한다. 배를 솎고 배봉지를 쌀 때까지 그가 나중에라는 단서를 안 붙이는 유일한 일이 배농사다. 그래서 저 사람이 이 일은 정말 좋아한다고 미뤄 생각한다.


새참을 갖고 갔더니 얼굴이 햇볕에 익어 빨간 새우가 되어 있다. 어제 하루에도 300장을 쌌다니 나머지까지 싸고 나면 500장의 봉지를 쌀 것 같다. 그 다음부터는 여시같은 물까치를 어떻게 따돌리느냐에 승패가 달려있다. 올해도 배나무 밑에서는 내 빨갛고 긴 원피스 두 벌이 펄럭일 게고 배나무 위에는 플라스틱 매를 두어 마리가 뜰 것이다. 그런 가짜 허수아비들 덕분에 작년에도 배 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


[크기변환]20220613_104848.jpg


어제는 엄지손가락을 수술한 지 17일째 되는 날. 실밥을 뽑으러 읍내에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마침 김원장님이 휴천재에 오겠다는 전화를 했다. 척추수술 전문의니까 요까짓 손가락 끝 실밥 뽑아내는 것 쯤은 껌이겠다 싶어 너무 반가웠다. (불친절한 이곳 의사에게 남이 수술한 실밥을 뽑아달라 부탁할 일로 고민하던 중이었다). 아내 문섐이 내 부탁을 옆에서 듣고는, “당신이 수술 하라고 했으니 책임지라면서 남편을 보내더란다


김원장님은 온갖 장비를 다 들고 임실에서 휴천까지 왕진을 오셨는데, 휴천재는 의료시설이 전무한 오지여서 부엌 입구 태양빛 밑에서, 환자는 현관문에 기대 세우고 의사선생님은 아주 불편한 자세로 실밥을 끊어냈다열악한 조건에서 명의답게 훌륭하게 의료행위를 마치고 뒷처리를 말끔히 한 다음 왕진료는 점심상으로 대신했다.


국민의료 전문가로서 문섐은 가정의(家庭醫) 제도 도입에 관한 칼럼을 쓰느라 못 왔고 점심을 굶어가며 글을 쓰는 학자에 연구열에 불타는 아내를 둔 김원장님은 손이 많이 가는 아내를 자랑하였는데 그러고 보니 아내가 수술해서 아픈 손으로도 하늘같이 모셔야 하는 보스코는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크기변환]20220613_142310.jpg


[크기변환]20220613_180048.jpg


[크기변환]20220613_180354(1).jpg


어제는 모처럼 남호리 우리 신선초밭 구경도 시켜 드리고 도정을 지나 법화사 적멸보궁에 올라 멀리 천왕봉도 관광시겨 드렸다. 그러나 생각키로는 저 분들은 구경하는 장소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무게를 두는 듯하다.


어제 밤부터 1초에 한 방울 씩 떨어지던 빗방울도 오늘 종일 내리니 테라스에 설치한 휴천재 측우기’(플라스틱 딸기 그릇)20mm는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감질나는 대로 텃밭 푸성귀들이 오랜만에 기갈을 푸니, 나도 오늘은 길게 누워 독서 삼매경에 빠진다.


[크기변환]20220614_162101.jpg


오늘 저녁에 산티아고순례에서 생환한 임신부님과 이사야의 무용담을 듣기 위해 산청 산애들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40일을 걷느라 지칠 대로 지친 두 남정은 귀국한지 10여일이 지났어도 아직 기력이 안 돌아온다고 푸념이다. ‘더 젊어서 걷던지’, ‘과하지 않게 능력껏 자신의 몸과 타협을 하며 걸었어야 했다는 결론이라나? 아무튼 전세계에서 온 순례객들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저렇게 죽자사자 목숨 걸고 걷는지 이해가 안되더라나?


[크기변환]1655206069850-0.jpg


논에 물이 차고 나니 밤이면 아직 짝을 못 찾은 외짝 개구리의 애타는 구애 합창소리에 나도 누군가를 찾아 밖으로 나선다. 휴천재 감동의 처마에 개똥지빠뀌가 올해도 둥지를 마련하는 중. 다만 물까치떼의 극성스런 공격을 어떻게 피해서 그 일을 성사시킬지 궁금하다. 작년엔 둥지를 다 마련하고도 물까치떼에 쫓겨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아무튼 밤늦은 이 시각, 멀리서 소쩍새 소리는 왜 이리 아픈가?


[크기변환]20220613_06321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