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4일. 화요일
월요일 아침. 보스코는 배봉지를 싸겠다고 서두른다. “게으른 선비는 책장만 세고, 게으른 농부는 밭고랑만 센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의 경우에는 ‘책장만 세던 선비가 해 떨어지자 바쁜 농부가 된다.’고 말함직하다. 그가 배농사에 그리 마음을 쓰는 게 나로서는 신기하면서 고맙다. 그가 학자이긴 하지만 시골에 사는 이상 농사일도 어디 하나에 마음을 붙인다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유튜브에서 배우는 학습대로 배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퇴비를 끌어다 나무 밑에 흩어준다. 3월부터 흑성병이나 적성병이 생기나 살피고 2, 3주에 한번씩 살균 소독을 한다. 배를 솎고 배봉지를 쌀 때까지 그가 ‘나중에’라는 단서를 안 붙이는 유일한 일이 배농사다. 그래서 저 사람이 이 일은 정말 좋아한다고 미뤄 생각한다.
새참을 갖고 갔더니 얼굴이 햇볕에 익어 빨간 새우가 되어 있다. 어제 하루에도 300장을 쌌다니 나머지까지 싸고 나면 500장의 봉지를 쌀 것 같다. 그 다음부터는 여시같은 물까치를 어떻게 따돌리느냐에 승패가 달려있다. 올해도 배나무 밑에서는 내 빨갛고 긴 원피스 두 벌이 펄럭일 게고 배나무 위에는 플라스틱 매를 두어 마리가 뜰 것이다. 그런 가짜 허수아비들 덕분에 작년에도 배 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
어제는 엄지손가락을 수술한 지 17일째 되는 날. 실밥을 뽑으러 읍내에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마침 김원장님이 휴천재에 오겠다는 전화를 했다. 척추수술 전문의니까 요까짓 손가락 끝 실밥 뽑아내는 것 쯤은 껌이겠다 싶어 너무 반가웠다. (불친절한 이곳 의사에게 남이 수술한 실밥을 뽑아달라 부탁할 일로 고민하던 중이었다). 아내 문섐이 내 부탁을 옆에서 듣고는, “당신이 수술 하라고 했으니 책임지라”면서 남편을 보내더란다.
김원장님은 온갖 장비를 다 들고 임실에서 휴천까지 왕진을 오셨는데, 휴천재는 의료시설이 전무한 오지여서 부엌 입구 태양빛 밑에서, 환자는 현관문에 기대 세우고 의사선생님은 아주 불편한 자세로 실밥을 끊어냈다. 열악한 조건에서 명의답게 훌륭하게 의료행위를 마치고 뒷처리를 말끔히 한 다음 왕진료는 점심상으로 대신했다.
국민의료 전문가로서 문섐은 가정의(家庭醫) 제도 도입에 관한 칼럼을 쓰느라 못 왔고 점심을 굶어가며 글을 쓰는 학자에 연구열에 불타는 아내를 둔 김원장님은 ‘손이 많이 가는 아내’를 자랑하였는데 그러고 보니 아내가 수술해서 아픈 손으로도 하늘같이 모셔야 하는 보스코는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어제는 모처럼 남호리 우리 신선초밭 구경도 시켜 드리고 도정을 지나 법화사 적멸보궁에 올라 멀리 천왕봉도 관광시겨 드렸다. 그러나 생각키로는 저 분들은 구경하는 장소보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무게를 두는 듯하다.
어제 밤부터 1초에 한 방울 씩 떨어지던 빗방울도 오늘 종일 내리니 테라스에 설치한 ‘휴천재 측우기’(플라스틱 딸기 그릇)에 20mm는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감질나는 대로 텃밭 푸성귀들이 오랜만에 기갈을 푸니, 나도 오늘은 길게 누워 독서 삼매경에 빠진다.
오늘 저녁에 ‘산티아고순례’에서 생환한 임신부님과 이사야의 무용담을 듣기 위해 산청 ‘산애들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40일을 걷느라 지칠 대로 지친 두 남정은 귀국한지 10여일이 지났어도 아직 기력이 안 돌아온다고 푸념이다. ‘더 젊어서 걷던지’, ‘과하지 않게 능력껏 자신의 몸과 타협을 하며 걸었어야 했다’는 결론이라나? 아무튼 전세계에서 온 순례객들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저렇게 죽자사자 목숨 걸고 걷는지 이해가 안되더라나?
논에 물이 차고 나니 밤이면 아직 짝을 못 찾은 외짝 개구리의 애타는 구애 합창소리에 나도 누군가를 찾아 밖으로 나선다. 휴천재 감동의 처마에 개똥지빠뀌가 올해도 둥지를 마련하는 중. 다만 물까치떼의 극성스런 공격을 어떻게 피해서 그 일을 성사시킬지 궁금하다. 작년엔 둥지를 다 마련하고도 물까치떼에 쫓겨 포기하고 떠나버렸다. 아무튼 밤늦은 이 시각, 멀리서 소쩍새 소리는 왜 이리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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