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26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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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기예보가 아침에는 춥고 낮에는 따스해 일교차가 크겠다고 잔뜩 겁을 주곤 하지만 흐르는 계절을 거스릴 수는 없다. 창앞에 매화는 만개해 가고 어느 하루 갑자기 꽃샘 추위가 변덕만 안 부리면 올해 매실 농사엔 지장이 없겠다.


임실댁이 긴 겨울동안 서울 아들네에서 지내며 안 내려오니 마을회관 고스톱 판 친구들이 서운해 했다이제나 저제나 지두렀는데내려 오자마자 사흘만에 갑자기 서울로 얼굴을 감추니 또다시 걱정들이다. 함께 있으면 강아지들마냥 투덕거리다가도 눈에 안 보이면 그리운 게 반백년의 인정이다. 더구나 아짐들 절반이 본동댁’ ‘내동댁’ ‘중동댁’ ‘가동댁’ ‘외동댁’ 등등의 택호를 달고 있으니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어여쁜 처녀가 되어 옆집으로, 앞집으로, 뒷집으로 시집을 가서 늙어왔다. 한 동네에서 칠팔십년을 살아온 셈이요 친척 인척으로 서로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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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수십년을 살다 보니 얼굴도 마음도 거기서 거기다. “아, 촌사람들은 다 미인이제, 쌀 맹그는 미인(米人)! 우리는 이녘 낯바닥도 잊어뿔고 살아. 앞엣사람 낯바닥이 내 낯바닥이여. 촌 사람들 얼굴이 팽야 똑같제. 조르라니 서봐, 미스코리아 대회 헌 것맹키로.” (이번달 전라도닷컴에서)


나는 임실댁을 무척 좋아한다. '임실양반' 부면장님은 보스코와 동갑으로 살아 계실 때부터 우리와 다정하게 지냈고, 두 내외가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었다"시방은 낯바닥만 보제만 전에 세상은 심성 좋은 사람을 질로 쳤제낯바닥은 늙어 쪼그라져도 심성 고운 것은 안 빈헌게."(전라도닷컴) 그 우정으로 임실양반은 돌아가시면서 보스코에게 대세(代洗)를 받으셨다


임실댁은 보스코가 수술하고  내려오자 반갑다며 외간남자 손을 덥석 잡고 눈물바람을 하던 여인이다. 병상에 누운 아짐을 위해 9일 기도를 시작했다. 어제 산보길에는 강건너 산비탈에 있는부면장님 무덤으로 올라가 하늘에서 마누라 병을 꼭 낫게 해드리라고 부탁했다


오늘처럼 돼지막 쪽으로 산보를 하면 휴천강 다 내려와서 유영감님 내외의 산소가 있고 그 아래 허영감 부인의 묘소가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모경을 바쳐 고인들을 위로해 드렸다. 산봇길에 바치는 묵주 알로 세어보면 우리가 문정리에 집짓고 살면서부터 세상을 버린 노인들이 로사리오 두 단 스무 명에 가깝다. 낯익었던 그 노인들 어느새 앞산 옆산 양지바른 비탈로 옮겨가 뗏장 덮고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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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산봇길에서 돌아오는 길, 임실댁 고추밭 미처 뽑지 못한 고춧대에는 버려진 고추가 긴 가을 볕에 익어 겨울 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허옇게 탈색되어 무단히 매달려 있다그 중 붉은 빛이 선연한 고추를 골라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게 아짐이 농사지은 마지막 고추 아닐까?’ 하며 불안해지는 까닭을 모르겠다


사순절 첫 주일이건만 오늘도 공소예절에는 달랑 다섯 명이 전부. 추위에 공소 난방 보일러는 터졌고, 경단의 온풍기마저 작동을 안 해서, 토하도록 고약한 냄새가 나는 석유난로가 난방 수단 전부였다. 겨울이 끝나가니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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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가 다 돌아가신 유영감님댁 담벼락에서 지난 주에 그 집 아들이 칸나를 삽질하고 있었다. 한남마을에서 공소 오는 엘리사벳씨가 그와 아는 사이 같아,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문정학교' 1년 후배에다 '문정공소 주일학교' 같은 반 학생이었단다. 그 당시에 주일이면 이 주변 마을에 많은 애들이 공소에 왔고, 헤드빅 수녀님이 그 애들에게 등록금을 주셔서 공부하려는 애들은 대부분 그 뜻을 이뤘단다


수녀님은 주일을 빼고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티타임이라는 시간을 가져 마을 아짐들이 오후에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시간도 마련하였으니, 시골에서는 아낙들이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호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그 빛나던 시간들이 다 사라졌고 공소에 나오는 일부 신자들마저 공소 안에 찬바람만 썰렁하니 안타깝단다. 오늘 복음에서 유혹받으신 예수님 얘기를 읽었는데, 내게도 공소예절보다 차라리 본당에 나가 미사참례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곤 한다.


보스코의 주일복음단상 :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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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후의 교회에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고, 윤가가 하는 나라 정치도 국제 정치도 대자연의 환경까지도 암담하기만 하니, 인류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생활을 누린다는 지금이 롤라코스트처럼 거꾸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고, 지구의 끝날이 가까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불안하다.


겨울이 끝나가며 집안에 들어온 꽃들이 마지막 효도를 하는듯 예쁘다. 오늘 오후에 산보를 하다보니 개불알 꽃이 만발했고, 달래와, 흙빛으로 위장한 냉이도 묵정밭에 가득하다. 뽑아온 달래는 달래장을 만들어 김을 구워 싸 먹고 냉이는 된장국을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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