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아침부터 구름 비는 안 오고 간혹 찔끔...

 

밭에 가면 언제나 할 일이 있다. 배나무에 올라가 딱 알맞게 큰, 춘향이 얼굴마냥 갸름하고 이쁜 호박을 하나 땄다. 오달지다. 밭에서는 늦도록 뽑아내지 않았더니 전번 아욱에서 떨어진 씨앗이  뿌려졌는지 새싹이 되어 귀엽게 자라오르고 있다. 잡초와는 너무도 달라 보인다. 하도 반가워 "귀여운 내 새끼!"라는 말이 절로 나오려고 한다. 이기자네가 준 배추는 착근을 잘 해서 크기만 하면 된다. 푸른 잎들이 연달아 돋아나고 있다.

 

고추는 병을 이기고 제법 마지막 정열을 가지 끝으로 보내는지 어린 고추가 조랑조랑 열려 있다. 서리가 내리려면 한 달쯤 남았으니 그동안 한번 용을 써보려무나. 들깨가 제법 송이를 맺은 것을 보고서 현미찹쌀을 담궜다. 빻아다가 풀을 쒀서 깨송이를 만들어 술안주로 튀겨내면 좋겠다. 케일 잎사귀를 따고 호박닢을 다듬어 찜통에 넣어 찌고 호박나물을 하니 오늘 점심은 또 진수성찬... 보스코가 "호박나물에 호박닢국에 호박닢쌈에..."라면서 젓거락으로 가지수를 센다.

 

오후에는 빵기에게 보낼 추석선물을 싸들고 유림으로 나갔다. 시아에게 보낼 장난감 스무피(빵기와 빵고가 이탈리아말로 "뿌피"라고 부르면서 어릴 적에 갖고 놀고 모으고 하던 것인데  사반세기 동안 고스란히 보관이 되어 절반을 보냈다. 절반은 여기오면 갖고 놀라고 남기고서. 뿌피마다 발치에 '빵기' 아니면 '빵고'라고 주인 이름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설악산에서 문철웅 선생이 보내준 겨우살이, 빵기가 부탁해서 매운 햇고추를 방금 빻은 고춧가루, 빵기의 허리띠 등을 서울 사부인에게 보냈다. 추석 직후 사돈네 부부가 스위스로 딸네를 보러 가신단다. 둥글레차는 구하는 대로 보내야겠다.

 

돌아오는 길로 도정 김교수댁엘 올라가 보았다. 비가 좀 내려주겠지 하면서 오늘낼 기다렸는데 가망이 없어 보였다. 가을 들꽃이 만발하고 코스모스는 지천으로 아름다웠다. 주인이 없어도 꽃들은 너무나 잘 피어 있어 기특했지만 보아주는 눈이 없어 서글프기도 했다. 두 분이 올라간지 두 주간이 되어 난초에 물을 듬뿍 주고 선인장들을 손보았다. 제라늄은 목말라 죽기 직전이라서 챙겨왔다. 살려서 되돌려줘야지...

 

두 분이 떠나기 전날 심었다는 배추를 찾아 아랫터밭, 윗터밭 다 뒤졌는데 축대 위에 땅을 잘 손질해 거기에 심어두었다. 50여포기를 심었다고 들었는데 말라죽고 벌레먹고 하여 열댓폭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물도 물뿌리개도 안 보여 "그래, 너네 주인 올 때까지 잘 커 봐!"라는 격려만 남기고 내려왔다.

 

알던 사람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과 임시라도 떠나고 없다는 것은 얼마나 차이나는가! 그들의 현존이 그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것과, 떠나면서 그 생명을 거둬가버리는 차이랄까?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든 곳일레라." 어느 노래 가사더라? 김교수댁 두 분이 빨리 내려와 한밤까지 파르스름한 불로 불꽃놀이를 하는 저 반딧불이들처럼 그 집 창가에 켜둔 불빛을 우리에게 보여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