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9 일요일. 참 맑은 날씨


금요일 아침 겨울 날씨답지 않게 따뜻하다. 해가 좋으면 늘 내게 도지는 병이 빨래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뒤져 보고 모조리 걷어다 무명과 유채색으로 나누고 옷감의 종류로 또 나눈다. 오늘은 침대 시트와 테이블 보며 큰 수건들을 모아 아래층 큰 세탁기에 넣고서 삶는 빨래를 하고, 이층 작은 세탁기에서는 패딩 잠바 다섯 개를 빨았다. 해가 좋고 건조해서 상큼하게 마르니 기분도 좋다. 빨래해서 반듯하게 손질하여 옷장에 정리해 넣으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정감이 든다. 보스코도 이제는 더 이상 나더러 또 빨래해?!” 라고 성화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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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산보 코스는 문상으로 올라가 돼지막 쪽으로 해서 큰길을 건너 광수아저씨 무덤, 좀 더 내려와 미카엘라 아줌마 무덤을 찾았다산보길에 이아빠를 만났는데, 우리를 잘 몰라보는 표정이다. 폐암 치료를 받으며 힘이 들어 기억을 놓쳤나 본데, 그래도 몸은 건강해 보였다. 언덕 넘어 고추밭에서는 이엄마가 마른 고추대를 뽑고 있었다 산속 여인네의 삶이란 계절 없이 흙과 하나로 범벅이 된다"올여름 내내 민물장어를 들기름에 볶아 이틀을 가마솥에 고아 명주 수건으로 꼭 짜서 남편 봉양하기를 열두 솥을 했고, 그걸 먹고 남편의 병이 싹 사라졌다,"고 그간의 남편 병구완을 내게 설명한다


자기의 수고나 고통은 생각도 않는, 전형적인 현묘양처가 한겨울 고추밭에서 고춧대와 씨름하고 있다. '남편의 병세가 호전되며 나도 많이 건강해졌다'지만 정작 본인은 복수로 배가 부르고 신장의 문제로 얼굴이 많이 부석하다가족 중에 누구라도 아프면 여자들의 병은 등 뒤로 숨고 마는데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보다 여자의 생명을 먼저 거둬가 버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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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감 묘 앞에서 주모경을 바치고, 조금 더 내려오다가 미카엘라 아줌마 묘소 앞에서도 주모경을 바쳤다. 아내를 먼저 보낸 허씨 아저씨의 애잔한 사랑이 새로 한 묘석, 묘지로 내려오는 계단 하나하나에도 녹아있어, '부인이 많이 그리우셨구나' 느껴진다. 아내가 먼저 떠난 유영감님 묘소에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아 '그곳에 가셔서 안노인과 잘 지내시는구나' 하며 안도감을 준다


지팡이를 짚고 앞서가는 보스코를 바라보며, 사람이 태어나고 병들고 늙으면 그 다음 죽는 것이 이치인데, 왜 내게만은 사별이라는 게 조금도 현실감이 없는 걸까? 눈부시게 푸르른 휴천강물이 오히려 더 생생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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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심에 설렜던 한 달간 크리스마스트리, 카드,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한 식탁, 멀리서 가까이에서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 받던 아름다운 시간들도 갔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에 서면 정리를 하고 치우게 된다. 슬픔도 아쉬움도 담담히 받아들인다. 보스코와 크리스마스 트리의 방울을 떼내고 깜빡이 꼬마전등을 걷어내고 트리는 가지 째 상자에 담는다크리스마스환과 산타클로스, 사슴이며 아기양, 천사들도 처음 나왔던 상자 속으로 돌아가 일년 후를 기약한다


"여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성탄을 꾸밀까?" 보스코가 묻는다. "3층다락에서 저 물건들을 내려오고 들어 올려갈 힘이 있을 때까지." 라고 대꾸했지만, 내 생각에 "우리 둘이 있을 때까지"일 것 같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추억이 너무 가슴 아파 다시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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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는 머핀을 구웠다. 초콜릿 브라우니 머핀과, 생크림 머핀을 각각 스무 개 씩 구웠다다음 주 우리 없는 새 휴천재 창문을 바꾸러 오는 아저씨들에게 줄 간식과, 오늘 담양에 온다는 우리 둘째딸 '순둥이' 일행에게 주려고. 순둥이는 그것을 받더니만 묘지에 기도하러 온 살레시오회 지원자, 수련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빵고신부도 내게 전화를 받고서 "걔들이 제일 필요해요. 늘 배가 고프고, 잘 자라야 하는 살레시오 사랑스런 새싹들이에요." 라고 한다. 오늘 보스코는 스.선생 차를 얻어타고 (신호열 신부님이 이임하는 날이라서) 함양본당으로 주일미사를 갖고 나는 '순둥이'를 보러 담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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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이태석 신부가 돌아간지 12년이 되는 날. 1997~1998년 로마에서 우리랑 함께 지내다 그가 아프리카로 떠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이 변할 만큼의 세월이 두 번이나 흘렀다니... 시간은 붙잡아도 그냥 놔둬도 마구 달려간다. 담양 묘지에서 연도를 드리고 박신부님, 위신부와 유신부도 만나보니 빵고신부를 본듯 반갑다. 이게 바로 살레시안의 가족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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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단어린이장학회'와 함께 묘지내 성당에서 드린 박신부님의 미사에서 봉헌 예절에 이번에 새로 나온 신부 이태석전기가 전기 작가 이충렬 선생에 의해 제대에 봉헌되어 신부님과 더 가까이 더 많은 사람이 만날 기회를 갖게 됐다. 젊어서 죽은 한 사제의 가열찬 삶이 오래도록 향기를 풍긴다. 세월이 갈수록 그 향내가 짙어진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위지지 않는다."(도종환, “라일락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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