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맑음
"오늘이 며칠이지, 무슨 요일이구?" "어제가 목요일이었나? 그럼 일기를 안 썼나?" 치매 검사를 받을 때 제일 먼저 물어오는 질문이 "오늘이 며칠이죠, 무슨 요일이고?" 인데, TV뉴스도 안 보고 책만 읽다 보면 시간의 흐름에 둔감해져 전형적인 치매 증상이 일찌감치 나타난다. '치매검사 질문자에게도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들이대면 대답을 못할껄?' 그러다 "아~ 어제가 함양 장이었고 함양은 2,7장이니까 오늘이 23일 목요일이구나."하고 머리가 맑아온다.
장똘뱅이도 아니면서 장날을 기억하는 건 그날 나가야 하다못해 생낙지나 싱싱한 바지락을 만날 수 있어서다. 장날이면 채소 값도 싸고 무엇보다 사람 구경과 꽃 구경이 사람을 즐겁게 한다. 어제도 장에 가느라 동네를 내려가는데 동호댁이 모자에 핸드백까지 든 성장을 하고 나섰다. "어디 파티에 가세요?" "뭐라카노? 내 장에 안갑니꺼?" 내 차에 탄 아짐은 "묵을 것들은 모다 새끼들이 사다 주고 특별히 살 꺼도 엄지만, 노인 일자리 일당 통장에 들어왔는지 우체국에 통장 찍으러 가는디, 이왕 나선 것 함양 가서 사람 귀경도 좀 하러 나가는 참이라예." 그래서 그미의 휴천 면사무소행 길은 함양읍 장터로 연장되었다.
시골 동네 더구나 홀로 남아 사는 아짐들에게 사람 구경이 귀하다. 며칠 전에도 당산나무 밑에 중동댁(이 동네 최고령자)이 우두커니 앉아있기에 가던 차를 멈추고 누구를 기다리는지 물었다. "어데예. 동네가 텅 비었어. 아무도 엄고 그림자도 안 보여." 낼모레 100살 되는 할매도 사람이 고프다.
저녁 시간이면 윗동네로 올라가는 길에서 불이 환하게 켜진 데가 우리집뿐이라 부엌이 잘 들여다 보인다. 내가 저녁 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드물댁이 한참이나 길에서 들여다보고 있더란다. "왜 보고만 있었어요, 들어오지 않구?"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미져서." 자식들마저 모조리 대처로 나간 지 10년 넘어, 누군가를 위해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때가 아득한 추억일 게다.
어제는 동지여서 동지 팥죽을 쑤었다. 절기와 축제를 챙기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부부는 가능한 한 그 날을 기억하여 축제로 보내려 한다. 드물댁이 힘없이 자기집 마루에 앉아있었다. 거문굴댁이 '양념장 맛나게 해서 무밥 해 먹자', '밭에서 언 배추 뽑아다 배추적도 꿔 먹자' 하고는 부르러 오지도 않고 전화도 없어 부화가 난단다. 집으로 데려와 아짐은 죽을 젓고 나는 새알을 만들어 펄떡펄떡 팥죽을 끓여서 크게 한 그릇 퍼주었다.
국수녀님이 '언니 수녀님'(고령의 은퇴 수녀를 이렇게들 부른다)이 만들었다고 성탄선물로 '아기 양' 한 마리를 부쳐주었다. 얼마나 귀여운지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쳐다보는 그 눈길이 너무 간절해, 혼자 먹기가 민망스러워 보스코 쪽으로 돌려 놓으니 그도 양을 쳐다보느라 수저가 굼뜬다. 올해처럼 살아가기 힘든 시절에 하느님 손길만 쳐다보는 어린 양 같은 수녀님들 눈길이 밟혀 하느님도 궁리가 많으실 게다.
오늘 오후에는 보스코랑 집 마당 화단과 휴천재 올라오는 길가 꽃밭을 손질해서 말라 죽은 꽃대와 풀을 베어내고 길바닥을 빗자루질 했다. 보스코가 여러 날 걸려 전지 작업을 한 배밭의 잔가지들도 한데 모았다. 그렇게 2021년 가을걷이가 끝났다.
통진당 이석기 의원이 형기의 80%를 채우고 내일 10시에 가석방으로 풀려 나온단다. 가석방이라니! '촛불정권'을 자처한 문정부라면 당연히 일찍 석방하고 사면하고 죄스러워했어야 할 터인데 임기 말년에야 생색내듯 하고는 더구나 '전자발찌'를 채운다고? 참 비겁한 정권이다!
기득권이 자기네 정적을 빨갱이라고 색칠해 가두고 죽이고 하여 의로운 애국지사들은 얼마나 불의하고 억울한 세월을 보냈던가! 안에 들어간 사람들보다 밖에서 더 고통스러웠던 아내와 가족의 서러움을 내 막내딸 '꼬맹이'한테서 내 두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들이 석방되어 나와서도 민족과 통일에 대한 꿈과 열정을 꺾지 않기를 바란다. 저들의 희생 위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라도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에 국민은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구세주로 모시는 그리스도가 민중봉기로 않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문제해결에 착수했다는 사실이 그들의 옥살이에도 머리를 숙이게 된다. 그가 마굿간 헛청에서 태어난 날이 이틀 남은 이 시점이어서 더군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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