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일 일요일. 흐림


아들이 온다고 보스코는 머리를 깎고 나는 시장을 보고 구석구석 집안 청소도 한다. 말하자면 부대장 방문으로 내무사열을 받는 쫄병 같달까? 덕분에 구석구석 뒤져내고 목욕탕도 나무 깔판을 다 들어낸 뒤 머리카락과 먼지를 닦아낸다. 일년에 두어 번 오는 아들의 '본가방문(本家房門)'이니 이런 수선을 떨지 아마 자주 오면 소 닭 보듯 할 게다


아들이 처음 군대 갔을 때도 훈련소에서 보내온 옷가지를 끌어안고 설음에 겨워, 보고 싶어, 눈물 바람을 하다가, 휴가를 자주 나오면 자식이야 기대에 부풀어 '엄마! 나 왔어요.'라는데 ', 너 또 왔어?'라고 대꾸해 아들을 속상하게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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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에 도착하는 아들을 데리러 읍내로 나가며 포토재를 넘는데, 멧돼지나 고라니를 만날까 긴장되어 일부러 딸들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큰딸'은 스무 명 가까운 식구들의 사흘 낮 사흘 밤의 명절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순둥이'는 명절 앞서 불어난 손님, 더구나 네팔 후원회 손님들을 치르느라 아픈 다리로 지쳐가는 중. '귀요미'는 105세 시어머니 문안을 마치자마자 친정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제주도에 가 있다니 바쁜 사람에게는 급한 일이 '단체로' 닥쳐온다. '꼬맹이'는 십 년 넘어 다시 만난 공안 정국을 추스리느라 맘고생 중이다. 


우리 모두 연로하신 부모님을 두어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깊은 밤 전화 한 통으로도 초긴장 상태의 시간을 가졌지만, 이제는 주변 지인들 거의가 그렇듯이, 보스코나 나 양쪽이 어른들은 다 보내드리고 이제 우리가 자녀에게 심야의 전화통을 불안케 하는 시기로 다가가는 중이다.


버스에서 내린 빵고신부는 양손에 무언가 가득 들고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언제라도 반가운 게 자식이라서 운전석을 아들에게 내주고 조수석에 푸근히 앉아 아까 왔던 산길을 돌아온다. 이젠 멧돼지도 고라니도 겁나지 않는다. 관구관에서도 몇 년 동안 본가 방문을 못 갔던 회원들이 이번에는 대부분 떠났단다. 그 가족들의 기쁨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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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점심에 본당신부님이랑 수녀님이 오셨다. 아들 신부가 집에 와 있어 함께 점심 하시자고 초대했다. 내일이 정월 초하루 설날이고 주일이니 본당신부님은 아마 부모님댁에도 못 가실 게다. '식간'을 맡는 사람이 명절 휴가를 가버리면 큰 명절에 잔치는커녕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제들이 많다는 얘길 들어 안다.


일년내 관구비서로 일에 묻혀 살다가 모처럼 집에 오면 아들이 제일 많이 하는 일은 자는 일이다. 오전에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또 내쳐 잔다.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사는지 잠들어 있는 모습만으로도 짠한 게 엄마 마음이다. 허지만 저녁에 아들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예하고 짤막한 아들의 강론을 듣는 기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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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성녀 아녜스 축일이기도 했다주변에 우리가 아는 '아녜스들'에게 축하 전화를 했다삶에 쫓기는 중에도 성무일도에 표시된 성인성녀 축일을 맞아 이날 하루 내 가톨릭 지인들을 기억하며 전화로 나마 축하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물을 수 있으니 수호 성인이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모든 아녜스들'이 자기 있는 자라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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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지난 3년간 추석에도 설날에도 텅텅 비었던 동네 골목에 자가용이 가득하다. 애들 소리도 들리고, 모처럼 '엄마손' 음식에 배부른 자손들이 아이 어른 어울려 논길 숲길, 동네 위아래 길에 눈에 띈다. 동네아짐들은 자식들 온다는 반가움에 몇 번이고 장을 보러 나가 비었던 냉장고를 채웠으리라.


거문굴댁은 아들이 메밀묵이 먹고 싶다 했다며 메밀 두 되를 팔아다 씻어서 갈아서 걸러서 메밀묵을 쑤었단다. 그 얘기를 듣고 "나도 그 묵 한 모 얻어다 줘요." 했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던 드물댁은 팔아다 놓은 메밀이 한 되 있다며 아예 메밀을 통째로 내놓는다. 어려서 '메밀묵! 찹쌀떠억!' 하던 소리에 한 모 사서 김치 썰고 들기름 넣어 동짓달 긴긴밤에 꿀맛으로 먹던 추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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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댁이 주는 메밀을 씻어불려말려 함양 장터 방앗간에 갔다. '설 밑에 메밀을 빻으면 기계 청소를 해야 하니 안 빻아 주겠다'는 대꾸에, 함양 장사꾼들이 얼마나 불친절한지 몸에 밴 터라 사정사정해서 겨우 빻아 왔다드물댁에게 가루를 건네주며 '묵은 아짐이 쑤어서 한 모만 줘요.' 했다. 어제 아침 일찍 드물댁이 가져온 메밀묵은 역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꿀맛이었다.


아침에 작은아들의 세배를 받고, 큰아들네한테는 화상통화로 설인사를 받았다부모를 나란히 앉힌 작은아들은 "두 분에게 두 번하고 반절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한번 하고 말겠습니다."라는 농담까지 하며 넙죽 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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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점심으로 떡국을 먹고 빵고신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진주 CGV에 가서 영화 "아바타2. 물의 길"3D로 보고 왔다. 설날 가족 단위로 보러 온 사람들이 참 많았다. 자연 보존과 사랑을 메시지로 띄운 카메론 감독이 돋보였다.


저녁에 산청 사는 미루가 '설날 친정 나들이'를 와서 함께 설날 미사를 드리고 장만한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나이 들수록, 명절에 찾아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인지,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해가 갈수록 절실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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