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2일 일요일. 맑음


토요일 아침 6, “여보, 나 잠깐 밭 좀 둘러보고 올게요.” 하고 나가서는 9시가 되어서야 돌아오니 보스코는 너무 배가 고파 식은 차와 어제 남긴 케이크 한 쪽을 아침으로 먹었단다. ‘도대체 그 세 시간 동안 무얼 했나 한번 적어 보라.’는 요구도 나왔다. '놀거나 딴 전을 피운 게 아닌데 언제 그렇게 시간이 갔지?'  나도 한번 내 새벽시간의 일과를 기억에서 더듬어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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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으로 내려가자마자 배추벌레 잡고, 오이를 지주대에 다시 묶어주고, 상추밭 풀 뽑고, 길가에 쇤 파슬리에서 씨를 받아 당근 옆에 심어주고, 붉은 고추 따고, 부추를 낫으로 베어 드물댁한테 갖다 주고 (가려서 나물 해 먹으라고), 휴천재 올라오는 마을길옆 우리 꽃밭에서 풀 뽑고, 밭고랑들 풀도 뽑고... "아 참, 가지 호박 따고, 호박잎 따다 찌고, 민들레와 피마자 잎 따다가 삶아 놓고..." 등등등 기억에도 안 나는 일들을 하느라 발바닥에 땀이 났는데... "그래서 휴천재에서만 내 핸폰 만보기는 하루 거의 1만보를 기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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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심히 '아침 고생'을 주워 섬기자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내 입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스코의 감탄 어린 한 마디. "여자들은 정말 말을 잘해! 쉽게도 하고 잘도 하고!" 남자들, 특히 보스코는 무슨 말을 한 마디 하려면 한참이나 생각하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얼마나 끙끙대는지! (단 강연이나 강의를 할 때에는 이상하게도 그의 혀가 풀린다.)


아무튼 지난 50년간 나는 남편과 아들 둘, 즉 남자 셋하고만 살았다. 그래 여자는 나 혼자여서 원 없이 말을 할 수 있었고 잔소리도 실컷 했던가 보다! 또 그래서 먼 옛날 보스코가 로마에서 공직생활을 하던 5년간, 공관에서 일하던 우리 공무원들과 현지인들이 일찌감치 터득했노라던 뒷다마가 수년 뒤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이 집에서 일하려면 하나만 알고 있음 돼. '마담이 법이다(Madama e’ la leg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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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복잡하고 두꺼운 책을 읽다 보면 가끔은 가벼운 어른 동화를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친구에게 톨스토이의 단편선 사람에게는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책을 보내 달라고 했다. 요즘 한국에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신문 지면을 어지럽히는 대부분의 건수가 "땅 문제"여선지 대문호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파흠이라는 농부 이야기. 그 농부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인 대지를 경작하느라 허튼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는데, 단지 땅이 넉넉치 않아 늘 아쉬웠단다. 그 사이를 악마가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땅을 많이 주어  이 자를 차지해야지!' 그동안 파흠은 이웃 여지주의 땅을 사들였지만 그것으로도 만족 못하고 이웃과 불화한다. 그리하여 더 넓은 더 좋은 땅으로 이사하고... 악마는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 거기서도 만족을 못하고 바슈키르인들의 땅을 찾아간다. 1000루불을 내고 파흠이 하루 종일 걸어서 돌고 오는 땅 전부를 받기로 했다. "당신의 발길이 닿는 곳 전부가 당신 땅이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만약에 당신이 출발한 그 지점으로 하루 안에 못 돌아오면 당신의 돈은 사라지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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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흠은 욕심껏 걷다가 달렸다. 먹는 것도 쉬는 것도 잊고서. 그러다 보니 해가 기울었다. 얼마나 멀리까지 갔던지 이번엔 해가 지기 전에 걸음을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를 쓰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출발지점을 멀리 바라보면서 쓰러져 입에 피를 흘린 채 죽어버렸다. 바슈키르인들은 애석해 하며 일꾼을 시켜 파흠의 무덤을 만들고 더도 덜도 아닌 213.63cm를 파서 그를 묻어주었다. 하루 종일 죽어라 달려서 파흠이 차지한 땅이 자기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였다. 우리는 자주 이런 어리석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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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의 공소예절에는 다섯 명이 전부였다. 나중에 한남마을의 엘리사벳이 더 왔지만 공소가 너무 썰렁해서 안타깝다. 사람들이란 고양이와 같아 인심이 따스한 곳으로 모여드는데, 옆구리 한쪽으로 찬바람이 휘익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무슨 수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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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수로 모이는 공소이지만 지난 3년 동안 공소신자들의 교무금과 주일헌금으로 35년된 건물 지붕기와도 수리하고 소성당도 정비하고 방들도 판자로 둘러 도배하고 며칠 전에는 35년 묵은 보일라도 교체하는 등, 잘하면 손님 신부님이나 수도자의 상주를 준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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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녁 로사리오 산보는 초가을 바람이 선선해 걷기에 참 좋다. 그 시간이면 깎아 놓은 손톱같은 초생달이 와불산 산마루에서 우릴 기다리고(저 달이 다 차면 한가위다!) 초저녁 샛별이 우릴 따라 나선다. 돌아오는 길이 어둑해지면 기나긴 가을장마에 꼼짝 못했던 반딧불이들도 초가을 불꽃놀이를 하며 서둘러 짝을 찾아 사방에서 혼인 비행을 한다. 무논 위에 함께 날아오르는 반딧불이 항적을 바라보느라 멈춘 발걸음에 산보도 뒷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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