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8일 목요일. 맑음


69일에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8일이 제사날이다. 작년엔 첫 제사여서 갔지만 올해는 엄마 납골당(용인 유무상통’)에서 예배드리고 가까운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다니 우리 부부는 빵고신부에게 연미사를 부탁하고 집에서 연도를 바치기로 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형제 다섯이 어떻게라도 모였는데 온가족을 묶어주던 축이 사라진 쓸쓸함이다.  금년 하반기에 고양 묘지에 아버지랑 합장하는 계획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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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목요일 새벽 네시반. 눈을 뜨니 아직 밖이 어슴프레하다. 엊저녁 고추밭 김을 매는데, 잉구씨가 자기 밭 양파를 캤다며 한 망 가져와서는 나더러 감자 잎이 다 씨들었구먼. 놔두면 썩어요. 빨랑 캐이소.” 하고 갔다. 농사꾼의 한 마디는 귀촌인에게 교과서다. 새벽에 조용조용 옷을 챙겨 입고, 벌써 서재에 앉아 공부하는 보스코 몰래 살금살금 층계를 내려왔다. 텃밭 고랑에 앉아 막 호미질을 시작하려는데, 보스코가 내려왔다. 사쁜사쁜 내려가는 내 발걸음이 수상하더란다.


둘이서 9시까지 4시간을 캤으니 합이 8시간. 한 사람 몫 일당을 받을 노동이다. 드물댁이 올라와 들여다보더니 어람댁네 콩 모종 부으러 가서 못 도와준단다. 두어 시간 후에 어람댁이 자기더러 가보라 해서 왔다기에 우리 둘이 끝낼 테니 염려 말라며 말렸다. 그미의 동작이 굼떠지고 전보다 훨씬 힘들어한다. 나이탓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울 가고 없을 때 그미가 감자를 심었으니까 원주인은 드물댁인 셈. 한 망을 들려주었더니 미안타면서 받아 메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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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캐다 보면 땅속 '감자네 집안 사정'도 인간사와 다를 게 없다. 한 개가 유난히 실하면 나머지는 다 찌질이들이다. (큰아들 공부 시켜 출세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라 기대하지만 저만 아는 이기주의자로 형제는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은 크지는 않아도 예닐곱 개가 고만고만 사이좋게 컸다. (특별히 출세한 형제는 없어도 태어난 동네도 못들 떠나고 알콩달콩 우애 있고 재밌게 사는 사람들 같다.) 감자 잎이 왜소하고 다 시들었어도 속에 간판스타만큼 커다란 열매를 품고 있는 경우는 체소하고 허리굽고 쭈글쭈글한 어미 옆에 굴대장신 아들이 선 흐뭇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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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가 한 고랑 전부에 고속도로를 내고 야무지게 감자로 살아온 현장을 보았다. 캐낼만한 감자는 없고, 있는 것마저 이빨 자국 나거나 상해 있다. 오히려 두더지 영감이 아니 우리 농장을 어느 놈이 싸그리 거들냈노!”라며 큰소리 칠 듯하다.


고랑고랑에 감자를 모았다 손수레로 감자를 실어 올려 감동 바닥에 펼쳤다. 좀 마르고나서 크기에 따라 고르고 상자에 담아야 한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감자 캐면서 물린 깔따구에 보스코가 얼굴을 못 알아보는 떡얼굴로 부어올랐다! 이마가 불뚝 솟고 오른쪽 눈을 뜰 수 없게 위아랫 눈섶이 마주 붙었다. 약을 발라주고 먹였지만 더 붓기만 해서 오후에는 읍내 병원에 싣고 가 주사를 맞히고 약을 타와야 했다. 큰손주 시아도 모기 한방에 퉁퉁 붓곤 하는데, 바로 할베 체질이다. 날벌레 알러지를 닮은 것마저 흐뭇해 하는 게 할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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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느티나무독서회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나는 2년 전 읽었고 두번까지 읽고 싶은 책은 아니어서 빵기에게 S.Y.몽고메리가 지은 유인원과의 산책을 사달라 해서 읽는 중이다. 내가 읽는 책은 대부분 빵기가 사 보내준다. 내용이 괜찮아서 내가 읽은 후 빵기가 제네바로 가져가면 그곳의 교민들이 돌려 읽는단다. 그래서 여행의 이유는 벌써 외유 중이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군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6년을 6번이나 이사를 했다니 삶이 여행인 인생을 산 듯하다. 나도 교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경기도 일대를 몇 년에 한번씩 이사했고 대학 가서야 화전에 정착했으니까 늘 뿌리 못 내린 나무 같았다. 그래서 그 반작용으로 결혼하고 나서는 우이동 집 하나에서 45년을 살고 있다. 첫 집이자 마지막 집인 그곳에서 이승을 마감하고 싶다.


여행은 모르는 곳에서의 편안함, 나를 모르는 이들 사이의 익명성이 좋기도 하지만, 인생 역시 한편의 여행이라면, 이왕 하는 여행이라면, 그곳 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우리 역시 타인을 받아주는 화려한 만남의 여행이 나는좋다. 그래도 내게도 여행은 있던 곳으로의 귀소(歸巢)’에 큰 의미를 둔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내 둥지가 제일 편하고 행복했구나하는 깨달음! 그걸 위해서도 여행은 필요하다. 독서회 동무들도 모두 여행에서 설레던 감격의 순간을 이야기한다. 여행은 각자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희숙씨처럼 여행을 싫어한다는 사람도 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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