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28일 일요일. 흐림


금요일 오전. 적성병이 걸린 배나무 잎 뒷면은 털까지 듬성듬성 나서 흉물스럽다. 마치 능글맞은 늙은 영감 코 옆에 시커먼 점이 있고 점 위에 흰털까지 난 모습이랄까. 올해는 집 고치느라 한달간 서울에 가 있는 동안 배나무 소독의 때를 놓쳤고 배열매 속는 일도 아직 못하고 있었다. 보스코가 급한 대로 뱃잎소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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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앞 구장네 논은 밭으로 변했다. 구장이 죽자 한남댁이 남호리까지 오갈 차편이 없어(남편이 늘 경운기에 태우고 다녔다) 남호리 고추밭은 포기하고 이 논에다 고추를 가득 심었다. 벼를 심어 휴천재에서 내려다 보면 여름엔 푸른 잔디밭으로 가을엔 황금잔디로 우리 눈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이젠 잔디밭의 황홀한 바람결도 구장과 함께 사라졌다. 저녁 나절 한남댁이 고춧잎을 따낸다. 열릴 고추가 땅에 닿게 키워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고추잎은 비타민C 덩어리인데' 했더니 한남댁이 한 소쿠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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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옆논의 작년과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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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부처님 오신 날. 모두 실상사에 갔다. ‘지리산종교연대가 축하 노래를 부르기로 했는데 연습할 시간이 없어 한시간 먼저 가 대중방(회의실)에서 연습을 했다. 늘 부르던 노래 모두가 꽃이야는 별 문제 없는데, 오늘 새로 작곡한 분이 직접 연습시키는 곡 미처 몰랐네는 처음이라 대중들 앞에서 부르기엔 좀 걱정스러웠다. 내용과 곡이 평이하고 쉬워 두번만 따라하면 시골할메도 다들 할 만하다. 평범한 가사 속에 불교의 무아사상을 노래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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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이었음을/ 미안해 미안해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이었음을/ 고마워 고마워


4대 종단(불교, 원불교, 신구 기독교)의 이름으로, 비쥬얼로 노래를 하고는 박수도 받고 절밥도 얻어 먹고 보니,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음덕이 크긴크시다. 부처님 잘 태어나셨습니다. 하기야 우리같은 불쌍한 중생이 등산버스로 몇 차씩이 끝이 안 보이게 줄을 서 공양을 했으니, 1500명분 밖에 점심 준비를 못했다는 주지 승묵스님의 걱정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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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주일이면 반드시 점심을 하지만 신도들끼리만 하고(천당도 자기 교회 사람들 아니면 못 간다고 믿는 신도들도 있다), 천주교는 점신 대접은 알절 없을 뿐더러 500원 동전 만한 종잇장 뻥튀기를 공손히 하나씩 받아먹으며 "성체(聖體)를 영()한다"고 하는데 "가톨릭에서 세례 받으신 분만 나오세요"라는 매몰찬 멘트가 붙곤 한다. 절에 오는 사람 모두에게 공양을 허락하는 인심으로 보아 부처님 음덕은 과연 대자대비하시다, 우선 먹이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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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54

그리고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 대축일엔 본당미사에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공소에 나오는 신자가 고작 5~6명이니 우리 둘이 빠지면 빈 자리가 너무 크다


어제 큰아들 빵기가 우리 나이 쉰이 되는 생일이기도 하다. 다음 달 말이면 빵기가 이룬 네 가족이 귀국하여 한 달을 함께 보낸다니 무척 설렌다. (보스코가 쓰는 핸드폰이 빵기 이름으로 등록된 것이어서 오늘 보스코가 '생신축하합니다'는 전화와 문자를 많이 받았다. 일일이 변명하자니 그렇고 생일축하 겹으로 받는 것도 싫지 않아 얼버무리며 넘어 가는 중이다. 그의 생일은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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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보스코가 배를 솎겠다고 나섰다. 하루에 세 그루씩 솎겠단다. 자기 눈으로도 적성병의 현상을 보면서도 포기 않는 게 기특하다. 나는 길가에 심은 영산홍이 유난히 예뻐서 아무래도 지나는 사람의 손을 탈것 같아 마당 안으로 옮겼다. 지리산 자락 마을이어서 그것도 산유화려니 하며 욕심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식당채 앞 화단 꽃이 져가는 애기팬지는 뽑아내고 여수 양선생이 보내준 루피너스로 바꿔 심었다. 저게 꽃을 피워 저 화분을 가득 채울 날이 언제일까 기다리는 재미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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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쯤 임실댁 논에 벼를 심었나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드려야겠다고 내려가 보니 그집 막내 미카엘이 와서 고추밭 풀을 치우고 고추대를 박고 있었다. 아랫 논도 물대고 갈고 모판을 사다 놓았다. 엄마가 못하면 저렇게 아들이 하는 법인데, 엄마는 늘 못 미더워 '모든 걸 내가 해야 한다'고 병상에서도 마음이 급하다.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도 인생에 대한 겸손한 순응의 자세다.


올라오는 길에 마을회관에 들르니 동네아짐들이 모두 놀고 있다. 다른 때 같으면 '부지깽이도 겅중대고 뛸' 농사철인데. 방바닥에 앉고 설 때마다 '아구구' 소리를 내는, 망가진 아짐들이어서, 자식들이 아침저녁 전화를 해서 "제발 일 나가지 마시라. 일하고선 아프다고 엄살들 마시라."는 경고성 구박에 부아가 나서 농사일을 놓고 이렇게 놀고 있단다. 물론 진심으로는 "자석들이 아침 저녁 안부를 묻고 요로코롬 어미 걱정을 해준다오."라는 자랑질(?)이지만 아무튼 다들 때를 알고 있다. 건너 산비탈에 누운 영감 곁으로 뗏장 이불 들추고 함께 덮으러 갈 때가 머잖아 온다는 것을.


석탄일에 주지스님께 감사패 받는 보살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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