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4일 목요일. 흐림


어제 수요일 아침에는 밭이랑을 만들었으니 장날 읍에서 사 온 야채 모종들을 심어야 했다. 고추 모종은 매운 것과 보통 것 두 가지를 샀는데, 가까이 심으면 벌이나 나비뿐만 아니라 바람까지 중신을 서서 모조리 매운 고추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작년에는 이쪽 끝에는 매운 것을, 안 매운 건 저쪽 끝에 심었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도 목숨 내놓고 연애를 했는데 식물들이라고 안주인 심보대로 따라 줄 리 없다. 가을에 딴 고추는 몽땅 청양고추가 되어서 나를 놀렸다. '사랑보다 강한 건 없다!' 창조주가 사랑이시고, 사람도 창조주의 모상으로 사랑으로 죽고 사니까, 동식물들도 매한가지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맥락은 생판 다르지만 보스코가 이 문장을 쓴 10여년 전이 생각난다. 내원참, 세상은 어찌도 이리 더디게 변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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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텃밭 빈 공간을 모조리 이랑으로 파올리면서 축대 밑 마지막 고랑까지 괭이질하더니 드물댁이 초봄에 심은 토란 종자도 다 뒤집는다. 그 고랑이 거름기가 너무 없어 퇴비와 유박을 섞어 채소를 제바로 키우란다. 나는 하릴없이 갓 뿌리를 내리던 토란을 다시 심고 그 옆에 어제 사온 대파 모종도 세 줄로 심었다. 우리 엄마는 내게 "땅이 조금만 있어도 파는 꼭 심어 먹어라. 파는 고자리를 많이 먹어 사 먹는 파에는 엄청난 양의 농약을 준단다." 타이르곤 하셨다.


오후 한 시까지 모종들을 다 심고 점심을 차렸다. 그날 아침에 내가 했던 다짐, "나도 노동자다. 오늘은 일했으니 점심은 안 한다!(함바집에 가서 사먹겠다!)"던 노동자 선언은 내가 고용주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난 50년간 여일하게 일년 365, 하루 세 끼 밥상을 차리는 나. '아무리 해도 티도 안 나고, 안 하면 바로 티 나는' 가사노동의 본질 그대로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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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비량에서 얻어온 연산홍. 몇 포기 축대 밑에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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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친구의 아버지가 산청 생비량에 사시는데 가까운 야산에 연산홍을 잔뜩 심으셨단다. 90이 다 된 연세에 농사짓기가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아, 딸이 '그 꽃들, 다 팔았다구요.'라고 선언하고 돈을 보내 드리고는 나더러 그 꽃을 캐가란다. 어제 오후 3시에 그 꽃을 보러 갔다. 가보니 200주나 되는 연산홍들이 얌전히 캐져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크기는 알맞게 작아 200주 라는 숫자에 질렸던 나에게 자기들을 잘 키워달라고 애걸한다.


오늘 목요일 아침, 9시 미루와 이사야랑 약초 시장에서 만나 연산홍을 실러 갔다. 연산홍을 나눠 가져오며 그 집이나 우리나 꽃을 좋아하여 무조건 사들이고 캐오고 하는 아낙들의 흐뭇한 표정과, 심을 일 걱정이 앞서는 두 남정 이사야와 보스코의 얼굴표정이 대조적이었다. 비가 온다고 하니 마음이 더 바빠진다. 두 집이 신나게 나눠 싣고 신나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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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시에 한 점심 약속을 130분으로 늦췄어도 임실에서 김원장님 부부랑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을 대기가 빠듯했다. 우리는 거의 두 달 만에 만났다. ‘임실치즈체험공원안에 있는 '화락당'이라는 프랑스식 식당에서 안주인이 정성스레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두 분은 야산 비탈의 한옥을 수리하느라 한 달 넘게 고생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비가 예보되어 목수가 안 오는 날이라 짬을 내어 우리와 만난 것이다. 캐나다 소나무판으로 올린 고가의 너와지붕을 손보는 중이다. 10여년 전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구해 비싸지만 소신을 갖고 공사했으나, 시공자가 비싼 스텐리스 못 대신 싸구려 쇠못을 써서 그 녹에 나무가 상해 50년은커녕 10년도 안 되어 지붕이 조각조각 떨어지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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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상한 조각은 버리고 그래도 쓸만한 조각 하나하나를 녹슨 쇠못을 빼고 두 부부가 락스에 담가 곰팡이를 제거하고 세제를 묻혀 박박 문질러 씻어 햇볕에 말리는 중이다. 한옥 세 채의 지붕에서 뜯어낸 나무 중 그래도 성해서 손질하고 말린 조각 전부를 모으면 한 채 지붕이나 씌울 수 있을까 한단다. 


남들이 보면 그 두 명의 의사 선생이 하릴없이 집 고치고 있느냐는 말도 하겠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가치관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그 부부가 존경스럽다. 내 지인들이 내가 하는 활동이나 텃밭 농사도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 두 사람이 개척하고 다듬어 꿈을 이뤄 놓은 3천평 뒷산을 함께 걸으며 나무를 잘라 쌓아 놓은 장작 창고, 우거진 숲을 헤쳐가며 만든 산책로, 고약한 잡초를 뽑아내고 맥문동이 자리 잡게 한 비탈, 온갖 종류의 산속 생존 투쟁에 도움을 주는 온갖 전동 연장들... 우리 눈에는 모든 게 경이롭고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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