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4일 화요일. 맑음


아들이 집에 머문 시간은 34. 365일 중 우리와 함께 할 시간은 정말 짧다. 아침 식사를 하고도 얼른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자기가 자고 간 침대 시트도 다 젖혀둔다. 빨기만 하면 된다. 자기 방 정리와 청소도 손댈 게 없다.


같은 살레시오회에서 양성을 받았는데 왜 보스코는 그런 교육이 안 되어 있는지 본인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도 그 오랜 기간 수련을 받았는데(보스코는 수련 제2, 성하윤은 수련 제42) 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줄 몰라요?" 답이 그럴 듯하다. "전순란에게  양성 받은 기간이 더 길어서 그래." 말하자면 '엄마가 다 해 줄 께'로 수련 받은 결혼생활 50년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변명이다배짱 하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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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야 정 더러우면 하겠지만, 세탁기 돌릴 줄도 모르고(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양말이나 손수건 하나 빠는 일 없고, 라면 하나 끓여 본 일 없고, 실생활의 그 어느 한 가닥도 모르고, 책상머리에 앉아 아우구스티누스와 씨름 하는 게 전부이니 "저 사람은 나 없으면 어떤 인생을 살까?" 상상해 보면 영 답이 안 나온다. 김원장님네가 우릴 만날 적마다 보스코에게 '홀로서기'를 열강하는데 털끝 만큼도 진척이 없어 실망이 여간 클 게다.


어제 아침 내내 빵고신부가 우리 두 사람의 핸드폰, 테블릿, 컴퓨터를 점검하더니 인터넷 주소들과 암호가 엉망이라며 다 갈아엎고, 다 점검하고, 비밀번호를 다 재설정하고서 새로 싸악 프린트해 준다. 우리야 쓰다가 안 되면 안 쓰면 그만이라는 배짱인데 젊은이의 눈으로는 이해가 안되나 보다. 새 번호들로 앱에 들어가는 연습을 나한테 시켜보고서 잘한다고 칭찬한 후에야 휴천재 '내무반 사열'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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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요미' 미루가 친정 오면서 설날 이받이로 장만해온 반찬들과 생대구탕으로 점심을  차려 먹이고 빵고신부를 읍내 버스터미널(350분 차)에 데려다 주었다. 평소 나는 버스 떠나기 5분 전에 도착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시간이 딱 돼서 가는 게 싫다며 20분 전에는 데려다 달란다. 주차비 아끼느라 빈자리를 찾아 빙빙 돌면 주차비 내고 당당히 세우라고 날 핀잔한다. '내 참, 아들이 크니까 시엄씨가 따로 없네!' 그래서 내 맘대로 해도 암 말 않고 지켜만 보는 남편이 제일 편한가 보다.


빵고신부가 떠난지 2시간인데 '이 명절 트래픽에 어디 쯤 갔을까?' 궁금해졌다. 그러자 '엄마, 저 인삼랜드에요.' 1시간 반 후에는 '입장휴게소에요.' 1시간 반 후에는 '서초IC로 나왔어요.' 그리고 '9시 강변역 나와 저녁으로 떡볶이 먹고 지하철 타고 수도원으로 가는 중이에요. 30분 후에 도착하고 그때는 어머니 주무실 테니까 전화 않겠어요. 맘 놓고 편히 쉬세요.' 어떻게 저리도 어미 맘을 잘 알아 시시각각으로 전화를 준담? 내가 집밖에 나가면 보스코가 간간이 전화를 해서 '전화, 그만해요.'라고 면박을 주곤 했는데, 오늘 느낀 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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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이 창과 문을 흔드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지리산은 하얀 눈꽃을 썼고 앞산들은 회리바람에 몰려다니는 눈송이들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수선거린다. 하도 날씨가 춥다 하여 이불 밖으로 나가려는 생각이 없다 '어어, 눈 왔네?' 하며 벌떡 일어났으니, 아직도 나에게 '눈'은 가슴 설레는 단어다


오늘은 빵고 덮던 홋이불들을 빨래하고, 식당채 유리창과 현관문 덧창으로 태양을 받아들이니 해가 드는 곳이 마치 벽난로 열기 만큼이나 따숩다. 아침기도에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축일'이라니 작은손주 시우의 영명축일이어서 걔를 위해 기도했다. 


보스코 영명은 '돈보스코', 나는 돈보스코의 모친  '맘마 마르가리타'(내가 남편보다 한 항렬 높다, 당연히!), 작은아들은 돈보스코의 제자 '도미니코', 작은손주는 (돈보스코 성인보다 한참 항렬 높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이니 우리 집안의 하늘나라 족보는 뒤죽박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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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에는 보스코의 서강대 철학과 제자이며 빵기의 2년 선배인 박경선씨가 아이 셋과 남편(영남대 교수)이랑 세배 차 휴천재에 들렀다. 정욱(고3), 정한(중3), 정민(중1) 세 사내애가 어찌나 정감이 가는지 반듯하게 아들 셋을 키워 놓은 엄마가 더 돋보인다.


큰애는 풀무학교에 다니는데 사제직이나 수도원에 마음을 두는 것 같다. 요즘처럼 재밌는 일이 많은 세상에 그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하고 싶다니 너무 기특하다. 다른 식구들이 자리를 피해주어 보스코랑 한참이나 얘기를 나누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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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파이와 한과와 차로 간식을 하고난 다음, 나와 경선씨가 부지런히 음식을 준비해 저녁을 먹었다. 한 상 가득 둘러앉은 애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 뿌듯하니 보스코도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라는 시편 구절이 절로 떠오를 게다. 그는 자기 생애 마지막 과제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상해(詩篇詳解)』라는 10년 짜리 대작에 여념이 없다, 그만한 여생을 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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