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9일 목요일. 맑음


구장댁이 밭에서 열무를 솎다가 동호댁과 우리가 나누는 말소리를 듣고는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어짜, 교수님은 좀 괜찮으요?" 그미가 우리를 걱정해줄 처지는 못 되는데도 희미하게 웃는다. 지난 봄 남편을 앞세우고 혼자 남아 그 많은 농사일을 해내려니 얼굴이 한 계절 지나며 10년은 한꺼번에 흘러 보낸 듯하다. 나보다도 서너 살 적은데 그간 머리가 하얗게 새고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 살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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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얼굴이 못 쓰게 됐네요." "그깐 얼굴이야 누가 봐주겠시요? 죽지 못해 사는 거죠." 그간 수십년 지켜봐 왔지만 피 하나 없이 말끔하던 그 집 논에도 미처 못 뽑은 피가 고개를 들고 남의 속을 긁는다. "송전 가는 길에 남 준 논도 방천이 났고, 마을 앞 논도 방천이 났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시요. 연화동 가는 길에 웃자란 벼는 태풍에 다 쓰러져 송전언니가 와서 함께 묶어 세웠지요. 그동안 몰랐는데 남편이 없는 자리가 이렇게 힘든지는 미쳐 몰랐어요." ('그러니 아픈 남편이라도 곁에 있는 건 행운인 줄 아세요'라는 메시지로 내게 들린다.) 남편 죽은 처음 몇 달은 송전 언니가 막차로 내려와서 잠동무가 되어 그미를 위로하고 새벽차로 올라가는 동기애를 보이더라는 드물댁 얘기를 전해들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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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리가 아파도 보스코더러 혼자 산보하라면 안 갈 것 같아 늘 내가 앞장선다. 어제는 문상마을로 올라가 돌아 내려오는 코스를 걸었다. 올라가는 길에 '잉구어머니'를 뵈었다. 다리가 아파 엉덩이를 땅 위에 끌며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아들 잉구를 보살핀다는 일념이 저 힘든 농사일을 해내는 힘이 되고, 잉구도 모친이 여기 계시기에 어려운 시골 생활을 견뎌내는 것이다. 엄마는 아들이 60을 넘겨도 여전히 엄마다.


아들이 한길가 휴천강변에 공장터 짓는 일을 우리가 환경운동차 말리자 10여년 전 우리와 사이가 벌어진 강영감이 마누라의 치매가 심해지면서 더는 우리에게 막말을 않는다. 우리 둘이 오손도손 언덕길 올라가는 모습을 어제 담 너머로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부럽다는 시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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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에 김원장님이 임실에서 남원에 나온 길에 휴천재에 들르겠다고 연락해왔다. 남원에서 추어탕까지 사들고 온 김원장님이랑 점심을 먹고 나서 나는 무릎 치료를 받으러 읍내에 갔고, 보스코는 김원장님과 담소하며 시간을 보냈다


문섐은 두레방유영님 원장이 시작한, ‘기지촌 여성들의 피해는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소송을 걸어 10여년 싸워 왔는데 대법원 판결이 오늘 나온다며 대책을 세우러 서울에 갔단다6.25 직후 정부가 기지촌을 개설하여 미군 장정들의 성욕을 해결해주고 정기 위생검진을 실시하고 그 가련한 여성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등 사실상 기지촌은 정부의 국책사업이었다. 다행히 오늘 대법원이 "미군 기지촌 성매매에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최종판결을 내려져 나도  유영님 원장에게 축하전활 해서 우리 '두레방'이 거둔 커다란 법률적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대법원 판결을 반기는 '두레방' 사람들(퍼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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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간 통증클리닉 의사는 내 앞의 허리 아픈 할머니도 20분쯤 돌봐드리고서 진료비 1500원을 받고, 내게도 20여분을 할애하며 정성껏 진료를 해주었다. 이탈리아 유치원 어린이 복장(grembiule)과 흡사한 가운을 입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우습기도 해서 저 의사섐은 언제 돈 벌어 임대료 내고 먹고사나?’ 환자들이 걱정하게 만든다.


집에 돌아오는 게 늦어 준비해 놓고 간 간식을 먹었냐고 읍내에서 전화했더니 잘 챙겨 먹었다는 보스코의 대답. 헌데 와서 보니 김원장님이 사들고 온 크로와플을 먹고 김원장님이 타주신 커피도 마셨단다. 금지된 음식이다.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일을 내는 어린애 같은 보스코라서 내가 잠시라도 눈을 못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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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휴천강변을 연화동 쪽으로 돌면서 로사리오를 바치고 저녁놀을 감상하였다. 김원장님은 오늘도 '우리 부부를 관찰해오면서 둘이 겹치는 부분과 안 겹치는 부분이 있어야 건강한 부부관계인데, 우리 둘은 너무 겹쳐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하나가 무너질 위험한 관계'라는 진단을 내렸다. 우리 두 아들이 하는 기도처럼 '한 날 한 시에 엄빠 같이 죽게 해 주십사' 비는 대로 죽음이 그렇게 친절하게 찾아오지는 않을 텐데 어떡하려는 심산이냐는 게 원장님 걱정이다. 좋은 친구들이라면 이런 측면에서도 우리를 걱정해 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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