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7일 화요일


날짜가 변해도 요일이 바뀌어도 특별히 달라지는 일은 없는 것이 노인들의 일상이다. 그렇다고 우리 둘 다 한없이 늑장 부리며 누워있을 성격은 못 된다. 7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침대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루를 시작한다. 특히 나는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해야 하루를 시작하는 출근자세가 된다. 세수 안 하고 오후까지 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크기변환]20220926_094550.jpg


특히 나는 머리를 말끔히 빗어 딴 다음 쪽을 짓지 않으면 정신이 안 난다. 그러다 보니 보스코는 나를 '삼소나'(여자 삼손)라고 부른다. 빵기를 낳고 백일 되던 때(48년 전) 딱 한 번 쇼트커트를 치고는 이제까지 생머리를 고수하는데 그때 내 쇼트커트를 보고 보스코가 기절할 듯한 표정이었다.


보스코 어렸을 적에 어머님도 고모님들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미장원에 가서 파마를 하고 오셨다는데 큰아들보스코의 생떼와 단식투쟁으로 다시 파마를 풀고 예전의 쪽진 머리로 돌아가야 하셨다니 마누라가 부시맨’(그는 파마 머리를 그렇게 부른다) 되는 걸 용납할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는 동네 아짐들이나 서울 아짐들도 100% 머리를 잘라 볶은 부시맨으로 보인다. 장날이면 읍내 미장원마다 머리를 볶느라 비닐 모자를 쓰고 짜장면 그릇을 손에 든 할매들을 떼지어 볼 수 있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쇼트커트 머리

[크기변환]IMG_1447.jpg


앞산부터 멀리 고개를 들고 내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한가롭고 편한데, 눈길이 우리 밭 주위나 마당 화단에 머물면 견디기가 힘들다. 잡초가 한 길씩 자라 올랐고 장미, 불두화, 반송들까지 나팔꽃 덩굴이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내 몸이 오그라든다. “아빠가 매어 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라는 동요를 누가 가르쳤을까? 말도 안되는 노래다. 나는 낫을 들고 달려가 나팔꽃, 사위질빵, 며느리밑씻개를 모조리 걷어냈다. 잡초의 꽃씨가 벌써 익어 터졌으니 내년에도 각오를 해야겠는데 올해처럼 40여일 집을 비우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보스코 책상 앞 창밖의 거미집(거미의 집 수선 광경을 하루 종일 관찰하는 보스코)

[크기변환]IMG_1415.JPG

수리공사 끝

[크기변환]IMG_1420.JPG


어제 저녁나절 전주 사는 윤희씨와 함양의 차자씨가 보스코의 병문안을 왔다. 우리가 문상 마을 산보길에서 돌아 내려오던 참이었다. 문정식당 앞 평상에서 간단한 해후를 하고 두 여인은 곧 떠났는데, 먼 길 온 손님에 대한 인사가 아니어서 미안했다


그 언덕길에서 이웃 사는 토마스2도 만났다차를 세우고 내려 보스코의 손을 잡고 바라보는 애잔한 눈길에서 십수 년 전 자신도 거쳐 온 생사의 갈림길을 함께하는 동병상린의 아픔이 느껴져 나마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그가 죽도록 아팠을 턴데 그 당시 내 이해심이 너무 가벼웠음을 죄스러워하는 눈물이었다


[크기변환]20220927_174407.jpg


우리 둘째 순둥이가 퇴원을 했다는데 아직 목발 짚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작은 장애물에도 걸려 넘어질 것 같아 사방이 지뢰밭 같다는 표현을 썼다. 고 작고 여린 몸에 상처를 입고 드러눕자 남편 전서방이 하느님께 항의하더란다. “하느님, 제가 말씀드렸지 않아요, 저여자는 건들지 마시라고?” 하느님을 진짜 아버지로 생각하는 아들만이 쓸 만한 떼여서 내 마음이 아려왔다. (어느 수녀님이 정말 내키지 않은 임지로 발령받아 가면서 하느님, 이거 정말 잘못 하시는 거에요. 후회하실 거에요.”라고 위협했노라는 고백이 생각난다.)


평소에도 월요일 새벽마다, 일요일 밤늦게 식당문을 닫고 피로에 젖어 밤새 잠 못 이루는 아내가 달리는 차 속에서라도 잠깐씩 눈을 붙이라고, 자기도 주방일로 피곤한 몸으로, 차를 몰아 강화도 바닷가들 찾는다는 거구의 전서방. 아내가 입원한 병실에서도 새벽 네 시면 휠체어에 아내를 태우고 병원 복도를 두어 시간 누비고 다닌다는 얘기도 순애보(純愛報)


[크기변환]20220927_174205.jpg


남편으로서 식당을 닫고 병원에 와서 밤새워 아내를 돌보느라 얼마나 애가 탔으면 병실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몇 시간이고 아침잠에 녹아떨어질까? 그미에게 꼭 맞는 짝을 묶어주신 하느님께 제발 우리 순둥이 더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게 해 주십사기도한다.


오늘 용유담 길로 로사리오 저녁 산보를 하면서 보스코의 병상을 염려하고 기도해준 모든 지인들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동네 아짐 하나가 저녁 어스름까지 논에 무성한 피를 낫질하느라 논에 파뭍혀 들어가 있어 논 속에 세워진 허수아비 같다. 그미는 몇 해 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서도 가족이 본인에게 알려주지 않아 '건강한 맘으로' 논밭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크기변환]20220926_17524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