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5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아침. 휴천재 창밖으로 보이는 지리산이 내게로 달려온다. 산이야 늘 거기 있어 나를 기다려 주기에 언제, 어디에서라도 돌아와 그 앞에 서면 뜨거운 포옹으로 나를 맞아준다. 기온이 내려가서만 아니라 볏논에도 곳곳의 감나무에도 가을 색깔이 완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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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샐러드라도 하려고 텃밭에 내려가 보니 40일 전에 심어놓고 간 상추는 그간 몇 차례의 큰비에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졌고, 씨를 맺고 있던 루콜라와 쑥갓에서 떨어진 씨앗에서 새로 돋아난 삭들은 그래도 먹을 만큼의 채소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드물댁이 배추, , 쪽파를 무척이나 잘 키워놓았다


전날 내려오는 차 속에서 올해는 김장을 안 할 생각이야. 겨울 농작 마늘도 양파도 안 심을 테야.’ 했더니 보스코가 '뭐든 그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하지는 마. 하루 이틀만 가면 마음이 바뀔 텐데.' 라고 했다. 남편이 아프고 나자 그의 건강 외에는 내게 중요한 게 하나도 안 보였는데, 벌써 하룻만에 할 일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오후에는 벌써 화단에 나 없는 새에 군데군데 터를 잡은 도깨비방망이와 복분자를 토벌하고읍에서 사온 상추 모종을 밭에 옮겨 심었다드물댁이 올라와 일손을 돕는 일상이 시작되었다그렇게 아프던 다리가 일단 밭일을 벌이자 갑자기 휴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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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비워 놓은 휴천재는 마룻바닥에서 검은 때가 나온다. 공해라고는 없고 창문도 

이건창호로 굳게 닫혔는데도 어디서 먼지가 스며들었을까? 하기야 맨땅도 100년이면 먼지만으로 1m의 높이의 흙이 쌓인다니, 공기는 흐르고 흐르는 대기에 먼지도 실려 다니다 원하는 곳에 내려앉겠지. 금요일 오전 내내 걸레질을 몇 번씩이나 거듭하자 집안 1, 2층이 다시 깨끗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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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는 시우가 그제(23생일을 맞아 사진을 보내왔다이국땅 벗들과 오순도순 행복한 세월을 보내는 손주들이 행운아로 보인다. 공부나 과외에 내몰리지 않고 놀며 누리며 학교 다니는 나날이 그곳의 삶이다.


저녁에는 미루네가 보스코의 안락의자를 싣고 와서 조립하여 주고 갔다. 회복기의 환자여서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몸에도 마음에도 제일 편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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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희정씨, 미해씨, 정옥씨가 보스코 문병차 휴천재를 방문했다. 10년 넘게 독서회를 같이 하다 보니 가족처럼 사이가 가까워져 보스코에게도 남다른 친밀감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다. 희정씨는 어머니가 원하셔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드렸는데 마치 모르는 곳에 방치한 느낌이 들어 영 마음이 편치 않단다. 반면 90이 다 된 시어머님을 집에서 모시고 있는 정옥씨는 일주일에 한번씩 오는 가족의 도움도 첨엔 불편했지만 마음을 내려놓자 모든 게 편해졌다고 한다. 가족사는 모두 아낙들에게 지워지는 까닭에 맘고생도 아낙들이 도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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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보스코랑 휴천강까지 산보를 갔다. 여위고 힘없는 그의 걸음걸이가 안쓰러웠지만 걸어야 회복이 빠르다니 이를 악물고 환자를 걸음마시키는 악처 노릇을 해야 한다. 마을 논둑길에서 임실댁을 만났다. 보스코를 보자마자 선상님 아프시다는 소식 듣고 찾아가 보지도 못하고... 이래 걸어다니시는 걸 뵈니 너무 좋네요.’라며 눈물을 주루룩 흘린다


죽은 줄 알았던 피붙이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듯, 동호댁도 아침에 나를 보자 내 손을 잡고 돌아와 줘서 고맙구로하며 펑펑 울었다. 시골살이 20여년에 마음으로 이어진 이웃이 되었음을 그간 보스코의 수술 소식을 듣고서 눈물바람으로 반겨주는 이웃 아낙들의 정에서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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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선선한 강바람에 다리 위를 오가며 로사리오를 올리고 돌아오던 석양길. 살아 있음과 죽음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죽어 가리라는 말이 실감난다.


공소예절이 없다는 문자가 떠서 함양성당으로 주일미사를 갔다. 신부님은 오늘 복음인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얘기에 경주 최부자의 가훈을 언급하셨다. 재산이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마땅히 이웃과 나눠야 할 책임이 있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대로 종교, 민족, 인종을 따지지 말고 필요한 사람이라면 당장 도와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렇게 살지 못한 인생의 후회가 "라자로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다 내 혀에 발라주었으면" 할 만큼 간절해지리라는 깨우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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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서 점심을 먹고 꽃무릇을 보자고 상림에 갔다. 꽃은 다 지고 꽃 진 줄기 밑에선 내년 봄을 예약하는 새싹이 돋아오른다. 그래도 한두 군데 그늘진 곳에 아직 떠나기가 아쉬운 꽃이 조금 남아 있어 꽃무릇 흔적을 보았다. 연꽃을 캐낸 상림 곁으로 이상한 서양종 꽃들을 모판으로 부어놓았고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인조 꽃밭을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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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재를 넘어 휴천재로 돌아왔다. 오도재 조망대에서 본 지리산 허리와 천왕봉의 위용이 대단하다. 한때는 저 능선 저 봉우리들을 우리 발로 오르내렸는데, 보스코의 체력으로도, 나의 무릎으로도 이제는 멀리서 바라보는 관망으로 만족해야 하는 패턴으로 바뀌어 간다. 나이드는 삶에서 내려놓기의 일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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