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18일 목요일. 흐림


밤 늦게나 새벽 일찍 핸폰에 소리가 나면 반갑기 보다 덜컥 걱정이 앞선다. 급한 일이 아니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기에(요즘 세상 우리 나이에 그렇게 서두를 일이 뭐 있겠나), 또 우리 나이가 삶과 죽음의 가장자리에 선 경계인(境界人)이기에 오늘은 또 누가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는 소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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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는 산 사람의 부고를 받아 한바탕 웃었는데 오늘도 부고가 떴다. 한신 우리 입학동기 이혜신 목사의 부친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다. 나 대학 다닐 때, 혜신이 아버지는 대학원을 다니셨고 너무 젊어’ “혜신이 아빠가 아니고 오빠야!”라고 놀리며 우리 동기 모두가 오빠라고 불렀다. 양로원에서 요양병원으로, 거기서 다시 혜신이가 자기 방에서 모시다가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져 지난 3월 요양병원으로 모셨다고 했는데, 5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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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네들이 너무 오래 살아 젊은이들 힘들게 한다는 소리도 나오지만 부모님들이 우리를 낳고 키우고 공부시키고 애면글면 다큰 자식도 보살펴온 여정을 생각하면 그분들을 보살피는 일은 당연한 인간 도리다. 유무상통에 계시던 울 엄마의 기저귀를 갈 때 딴 자식들이 역정낼까 걱정이던 호천이가 하던 말. “우리 어려서부터 세살까지 엄마가 기저귀 갈고 씻기고 먹였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다섯이니까, 3 곱하기 515, 울 엄마는 15년간 기저귀 찰 자격 있어. 그러니 다들 각오 하세요.” 20년 양로원 생활 중 엄마가 요양병원에서 지낸 기간은 겨우 3년이었으니 우린 모두 자기 몫을 다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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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요일 오전에는 한신대학원 수유리캠퍼스에 있는 기장여신도회연합회 사무실에서 두레방 운영위원회가 있었다. 문동환 목사님 사모님 문혜림여사가 살아계시던 때 의정부 두레방에서 시작한 인연이 20년 가까운 시간의 강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언제 그만 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말이 떨어지면 나도 이 짐을 벗는다.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젊은이들인데 운영위원은 대부분 내 또래니 노소가 서로 보완하는 좋은 관계일 수도 있겠다.

그 회합이 끝나고서 오후 2시에 한국염목사와 함께 서울대 장례식장으로 혜신네 상가로 문상을 갔다. 늘 따뜻하게 웃어주시던 목사님이 거기 기다리고 계셨다. 누구도 슬퍼하거나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 모든 장례식장의 모습이 한결같아 우리가 삶과 죽음에 이렇게도 초연한 민족이 되었음이 감탄스럽다. 이세진 목사님도 94세까지 사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거고, 나머지 세상일은 자식들과 손주들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아프고 쑤신 몸에서 해방되시어 하느님 나라에서 기쁜 나날 보내시라고 기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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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을 끝내고 나오다 한목사가 창경궁을 한 바퀴 돌고 가잔다. ‘자주 만날 수도 없는데, 다리야 다음에 고치기로하고 절뚝거리며 애들처럼 친구 따라 놀러갔다. 창덕궁을 지나 비원까지 가려는데, 내 걸음걸이를 돌아보던 친구가 너 오늘은 안 되겠다고 그냥 가자한다.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고나니 어쩌면 이리 감쪽같을까?

한목사 남편 최목사가 제주에서 트립티 일을 하다 보니 내 친구가 많이 심심한 것 같아 오늘 점심에 초대를 했다. 한솜이도 함께 왔다. 예전에 자기 중학교 다닐 때 엄마가 독일 가며 우리집에 자기를 맡겨 와있을 때가 기억난다며 30년만의 귀환을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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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뒷산 언덕 근린공원에 굴착기 소리가 요란하다. 구청에서 먼저 있던 간이정자와 운동기구를 철거하고 공원을 새로 조성한단다. 산 비탈 골짜기를 40여년전 정선생네, 유진네, 은경이네, 대풍이네 그리고 우리가 돈을 모아, 집짓는 터에서 퍼다 버리는 흙을 받아다 쌓아 주차장을 만들었고,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구청에서 심었다. 우리집 담밖의 공터는 저 밑 통장네 옆집 살던 할머니가 텃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지었는데, 아침마다 요강을 이고 한 참을 올라와 거름을 주곤 했다.


그 밭은 6m 지금 도로가 되고, 길 건너 산비탈에는 지금 서광빌라 두 동이 섰다. 뒷집도 아랫터도 연립주택으로 채워졌다. 그것들마저 머쟎아 모조리 헐리고 아파트촌으로 변한다니... 


우리가 우이동에 이사온 게 1978년이니, 반백년 세월이 보스코의 머리처럼 반백의 추억이 되었다. 앞으로 10년(혹은 20년)이면 이런 모든 기억도 하얗게 지워지리라.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집은 더 이상 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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