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3일 화요일. 맑음


남호리의 신선초는 이제 제자리를 잡아 무섭게 세를 키워간다. 다만 개망초와 쑥이 수십년 전부터 자신들이 먼저 차지했던 자리라고 텃세를 하니 밭주인인 내가 나서야 정해 준 서열에 따라 자랄 듯하다. 제자리서 싸우지 말고 크라고 일러도 꼭 남의 틈새를 찾아드는 오기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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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일찍 남호리 풀들의 세상을 바로잡으러 어사출또!’를 나가려고 차비를 하는데 밀양 송기인 신부님이 전화를 하셨다. “나다. 갈 테니 점심 좀 해라!” ! 경상도 남자에다 보스 기질이 철철 넘치는 분이다. 우리 집 오시면 늘 파스타를 해드리니 메뉴는 일정한데 오늘 점심 식사량이 예전보다 줄었고 희던 머리는 더 희어지고 걸음은 약간 휘청거리신다.


오늘 식탁에서 맞은편에 나를 쳐다보며 하시는 첫 마디가 너는 하나도 안 늙었는데 왜 서방은 저렇게 늙혔노!?” 매일 보는 나야 조금씩 늙어가는 서방의 모습이 눈에 익지만 오랜만에(이번에는 6개월만에 오셨다) 보면 보스코도 더 나이 들어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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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50년 전 갓 서른을 넘긴 보스코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가운데가 텅 빈 흰머리도 처음부터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 텐데... 그럼 남편의 눈에도 일흔을 넘긴 내 얼굴이 낯설까? 아무튼 그의 따스한 표정은 더 그윽해졌고 그와 함께하는 시공간에는 익숙한 평화가 가득하다.


그제 청학동에서 오마리아 언니가 봉재 언니더러 요양보호사의 보살핌을 받으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설득을 했건만 오늘 미루에게는 당신 혼자 다 할 수 있다며 완강하게 거부 하더란다. 늙어갈수록 자기의 쇠약함을 인정하고 자존심을 포기하고(give up)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겠다는 사실을 나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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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는 남호리에 혼자 갔다. 그럴 경우 동네 사람들은 산짐승도 무섭지만 사람이 더 무섭다며 내게 한 마디씩 충고를 한다. 그러나 내 손엔 잘 갈린 낫이 들려있다. 멧돼지가 달려들거나 설령 악당이 나타난다 해도 쑥이나 개망초를 뿌리 채 찍어 뽑는 오기가 있으니 무서울 게 없다. 신선초 밭을 절반 쯤 매다 어둑해지는 해거름에 보스코가 아내를 걱정할까 염려되어 일을 접고 집으로 돌아오니 내 걱정은커녕 책상에 앉아 돌아보지도 않는다. 저 남자는 초딩부터 실과시간에 나를 놀린다고 사내아이 이마를 괭이로 찍은 나의 전력을 잘 알고 있어 전순란 더구나 손에 낫을 든 내가 멧돼지나 악당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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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덜 나은 손목으로 연달아 하는 텃밭일과 남호리 일이 고되긴 고됐던지 밤새 끙끙 앓았다. 하지만 오늘도 점심 숟가락을 놓자마자 손가락과 팔목을 파스로 도배하고(진이엄마가 귀뜸해 준 민간요법) 보스코를 채근하여 함께 남호리 잡초 토벌에 출정했다. 나는 낫으로 쑥과 바랭이를 뿌리째 찍어내고 보스코는 괭이로 같은 작업을 했다.


지심 매기가 끝나갈 무렵 보스코의 퉁명스러운 한 마디. 이제 집에 가자. 나 그만하고 싶어.” “나머지는 어떡하고?” “내일 당신이 한 번 더 와서 하면 돼잖아?” “왜 그만하고 싶은데?” “그냥 하기 싫어.” “당신은 참 좋겠다. 초딩 1학년짜리 숙제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난 그게 안 되거든. 둘이서 한 시간만 더하면 끝날 테니 우리 간식 먹고 마저 끝내자, ?” 이렇게 어르고 달래서 올해 남호리 제1차 잡초 토벌을 마무리 지었다.


나이 들수록 남자는 어린애처럼 단순해지고 좀 멍청해진다. 늦저녁을 먹고 나서 굉이질로 힘들었는지 소파에 누워서 책을 보다 잠들어버린 보스코에게 침대에 가서 편히 자라니까 눈을 감은 채 책을 들고 침실로 걸어가는 모습도 어린애 그대로다. 저래서 여자가 좀 더 오래 살아 남편을 먼저 보내고서 한참 후 뒤따라가게 하느님이 남녀의 생체 시스템을 달리 설계하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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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순둥이의 건강 땜에 자매들 걱정이 크다. 순둥이 몸피의 두 배는 되는 남편 전서방의 아내 걱정은 곱절로 크다. 식당이라도 운영하려면 손님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모든 병이 생겨난다는데... 눈으로는 웃고 입으로는 친절하게 응대하지만 속에서는 불방망이가 다듬잇질을 한단다. 저렇게 속세에 살며 중생에게 들볶이다 보면 장사를 하는 사람은 도시의 사막에서 성자로 닦이나 보다. '엄마가 데꼬 들어온 딸'이어서 나 닮아 한 승질하는 우리 순둥이가 스님들처럼 다비식을 거치면 사리가 한 말은 나올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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