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7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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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라는 듯이 넘어가는 햇볕이 비춰주는 지리산의 단풍은 찬란하기만 하다. 우리 일생을 통해 가을 단풍처럼 기억에 화려하게 새겨둔 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슬프게 또 어떤 기억은 영원히 지우고 싶기도 할 터인데.... 그래도 어리석은 내 언행에 대한 쓰라린 기억보다 추억이 사랑스러워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일이 더 많다면 오로지 내 가까운 이들 덕이리라.


주일미사 제단에 꽂을 가을국화들을 한아름 꺾었다, 창조주 옆에서 시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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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려움을 견뎌내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다는 걸 아신 분께서 내 주변에 오로지 선을 찾는 많은 수도 성직자와 다정한 친구들을 배려해두셔서 별다른 마음고생을 안하고 여태껏 살아왔다. 되레 내가 마음고생 끼친 이들에게야 깊이 머리 숙여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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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에 손주 한빈이가 와서 집안 분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요즘 정신 바른 젊은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은 참 기특하다. 우리 며느리나 아래층 진이가 자기 아이들에게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하며 설득해 가는 모습이, 애들은 회초리가 약이라고 생각했던 성급한 우리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어제도 감동 옆에서 캠프파이어를 아이가 즐기도록 마련해주는데 우선 벽돌을 네 단 쌓고 잔가지와 신문지로 불을 피우고 적당히 불이 붙었을 때 장작을 넣어 불꽃을 키워 아름다운 불꽃을 아이의 뇌리에 남겨주었다. 불 속에 은박지로 싼 고구마를 구워 미각으로도 할머니의 집을 기억하게 해주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어른들은 자기들이 키우던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기회를 놓친 지도 미처 모르는 사람들이다.


캐나다에서 얼마 전 일시 귀국한 문교수님이 어제 밤에는 산청 한방가족호텔에서 머물고 오늘 아침 문정공소미사에 참석하였다. 문교수님은 캐나다 토론토 교구의 종신부제님으로서, 오늘 미사를 집전하신 임신부님의 배려로 미사를 공동집전하며 강론을 담당하였다. 종신부제는 영대를 오른쪽 어깨로부터 비스듬히 매는데 절반은 세속에 속하고 절반은 교회의 성스러운 성직에 속했다는 뜻이라는 풀이가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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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는 종신부제가 자기 전문직으로 생업을 해결하고 일주일에 열 시간 정도 교회에 무료로 봉사를 한단다. 예를 들면 심리학 교수는 재직하면서 교인들의 삶에서 어려운 일을 전문가로서 상담해 주고, 회계사인 부제는 교회의 재정관리를 도와주는 식이란다. 문부제님은 강남대학교 국제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은퇴한 분이다. 유럽에서는 사제가 워낙 부족하여 종신부제가 본당 살림을 온통 책임지고, (미사와 고백 외의) 모든 성사를 거행하면서 국가가 교구를 경유하여 생활비를 댄다, 대부분 국가에 '종교세'가 있으니까. 


성직주의가 워낙 드센 가톨릭교회가 기혼남자에게 종신부제직을 수여하여 평신도에게 뭔가 배려하는 듯한 제도 같지만, 개신교 출신인 나로서는 여성사제는 커녕 여성에게는 종신부제조차 허락 않는 가톨릭이 현대 세계의 사회 의식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느낌만 받는다. 앞으로 유럽이나 남미에서 사제가 더 줄고 신앙인들이 갈팡질팡하는 극한 상황이 와도 교황청이 여전히 여자를 성직에서 배제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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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에서 미사를 집전한 분들과 미루네가 우리 집으로 올라와 아침을 함께 먹고나서, 우리 부부는 문부제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단풍 구경도 할 겸 지리산 피아골로 떠났다. '피아골 피정의 집'에 도착하니 당신의 밴드('가톨릭성모방송국')을 통해서 열심히 가톨릭 영성을 펴는 김연준 원장 신부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강길웅 신부님이 계실 때 왔으니 10여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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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의 김신부님은 소싯적부터 마음에 각인된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이나 돈보스코 성인의 이미지 때문에 살레시안들에게 한없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분이었다. "변방에서 소외된 청소년들과 함께 살면서 인간성의 보석을 캐내는 것이 살레시안들의 특기"라는 특유한 설명을 내게 말해주었다. 당신이 먼저 일했던 소록도의 사목경험과 그곳에서 평생을 살고 간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님의 생애를 책으로 쓰고 영상자료를 제작하여 두 간호사의 삶을 기리는 운동을 하면서 그 운동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분들의 자선과 희사를 최근에는 오로지 캄보디아 살레시안들의 선교 활동에 쏟아 붓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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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의 집에 짐을 풀고서 연곡사를 지나 올라가는 피아골은 올가을 마지막 단풍길이라 차량과 인파로 가득했다. 문부제님과 우리 부부는 직전마을을 지나 선유교까지 계곡 길을 네 시간 가량 오가면서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숙소에 돌아와 원장신부님과 연곡마을로 내려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피아골 가을 하늘에 뜬 별자리들은 문정리 하늘보다 더 영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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