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3일 목요일,


어제 미루가 휴천재 텃밭에 와서 신선초를 베어가고 나니 그동안 신선초에 묻혀 숨어있던 풀들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보스코에게 저 풀들이 눈에 보일 적에 토벌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으니 아침 먹고 하겠단다. 낮기온이 30도 된다는데 새벽에 하면 좋겠다니까 순순히 일어나 예초기를 메고 일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가 나이니만큼 일을 시키면서도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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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배나무 밑에 제법 자란 옥수수를 예초기로 날려버려도 이미 그르친 터라 잔소리도 삼가고, 예초기 칼날이 적당히 남기곤 간 부분은 내가 낫으로 마무리하면서 그의 뒷마무리를 도왔다. 요새처럼 내 손에 힘이 없어 쓸 수 없을 땐 그의 존재와 활동이 고맙고도 새삼스럽다. 요즘은 요구르트 병을 새로 열 때도 그가 열어주고, 무거운 걸 들 때도 그에게 의존하니 내가 나이 들어 이런 때가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오히려 늘 병약하고 좌골신경통에다 말초신경 순환이 불량하여 약을 먹던 그가 배 나오는 걸 제외하고는 모든 병이 사라졌으니 무슨 조화인가 모르겠다. 좋으신 하느님은 부부로 묶어주신 남녀가 건강마저 부족한 점을 서로 채우게 안배하신다. 아침저녁으로 그가 다시 내 허리를 밟아주니까 밭일을  조금만 해도 골반이 어긋난 듯한 통증도 쉽사리 개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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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잉구네 엄마가 준 감자가 주먹만 하기에 오늘은 우리 텃밭 감자도 속사정이 궁금해 유영감님 장화에 짓밟힌 감자를 살짝 캐봤더니 그야말로 새알 만하다. 그래도 한 바가지가 나와 진이엄마에게 주었더니 지져먹겠단다. 저 엄니는 가지나 토마토를 심어도 누구네 집보다 튼실하게 자라고 열매를 푸짐하게 맺는데 비결이 뭘까? 허리를 펴지 못해 땅을 기어 다니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 식물들과 귓속말로 소통을 해설까?


남호리 진이네 농장의 체리가 무르 익었는데 진이엄마도 농장 일이 끝나고 나면 몸이 지쳐 따먹을 겨를이 없단다. 엊저녁 해거름에 보스코와 내가 진이네 체리나무 언덕으로 올라갔다. 낮에는 그렇게나 무덥더니 해질녘엔 휴천강에서 골짜기로 올라오는 바람에 에덴동산이 따로 없다. 낮은 가지에 열린 체리는 다 따먹었고 높다란 가지에 새빨간 볼을 한 체리들은 날 잡아봐라!’ 가지 뒤에 숨으며 숨바꼭질을 하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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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쓰다 버리신 손잡이 지팡이를 갖고 간 길이어서 지팡이로 가지를 휘어 잡고 따다가 먹다가 먹다가 따다가를 하다 보니 작은 소쿠리 둘을 채웠다. 집에 와 손질을 하고 나니 벌레 먹거나 벌에 쏘여 망가진 게 절반. 그래서 농약을 치지 않는 태평농법은 태평하게 마음먹고’ ‘대자연의 식구들과 반타작으로 나눠먹는’ '서로 좋은' 농법이다. 나만 먹겠다고 욕심 내다 보면 약을 치고 자연을 죽이고 결국 우리도 덩달아 같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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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눈을 뜨니 다섯 시가 좀 지났다. 가지치기 하거나 뽑아 놓은 풀들이 대충 말랐을 테니까 비에 다시 젖기 전에 새벽에 태우겠다니까 보스코가 말린다. 아침 9시부터 비가 온다 했으니 담에 천천히 하란다. 며칠 전 방곡에서 만난 물리학자 강교수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일기예보는 슈퍼 콤퓨터 건 무슨 기구를 써도 정확히 맞출 수는 없단다. 어차피 그동안의 추이를 관찰해온 전문가들이 이런 때는 이렇게 되리라는 가정 하에 투표를 해서 다수결에 따라 일기예보를 내보낸단다. 과연 감동 옆 공터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는데 7시가 조금 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투표가 맞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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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비가 내려 고맙고 좋은 일은 유영감님 아랫논에 채울 물이 내려서다. 영감님이 오늘 논을 치는데 신전에 참배하는 순례객처럼 얌전히 고무신을 논밖에 벗어놓고 논에 들어가 일을 하다 얌전히 논에서 나와 고무신을 얌전히 다시 싣는다. 하고한 날 죽음의 신과 샅바싸움을 하면서도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조상님 같은 땅의 호령이겠다그 끈질긴 집착을 우리 젊은것들이 무슨 수로 헤아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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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신선초를 베러 온 미루를 보니 이어지는 공장일로 몹시 지쳐 있었다. 오늘은 비도 오는 데다 체칠리아가 함양 장날 사다 준 바지락이랑 생낙지가 있어 해물 스파게티를 해주마 그 집 식구를 불렀다. 요새 유난히 지쳐 보이는 봉재언니도 함께했다. 75세가 넘어 두 번 백신을 맞은 사람도 늘어간다. ‘이웃 사촌이라는 말이 자주 보는 사람이 이웃임을 알려준다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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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대모님으로 부르는 패친 방스텔라씨가, 남편 노춘귀 수필작가가 편찬한 수필집을 보내왔다. 표지화와 삽화를 스텔라씨가 그려넣은 둥지가 따뜻해도 머물지 마라는 제목으로 이미 둥지를 떠난 두 아이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사랑이 짠하게 전해져 오는 따스한 시선이어서 한번 손에 잡으니 책을 놓기가 힘들다. 가족 해체의 이 시대에 가족을 묶는 끈이 무엇인지 조곤조곤 일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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