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7일 화요일, 맑음


텃밭의 늦마늘이 다 자라 머지않아 캐야 할 판인데, 겨울을 난 묵은 마늘 다발이 아직도 정자 기둥에 매달려 세찬 꽃샘 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자 나보다 드물댁이 더 성화다. 날 보고 얼른 정자로 올라가 마늘을 걷어오라고, 함께 까자고 한다. 그래서 목욕 후 산발한 머리로 마늘을 깐다. 시골에서야 아줌마들이 거울을 들여다보거나 얼굴에 뭔가 찍어 바른다는 개념도 없어 미용은커녕 세수도 안하는 터라, ‘나 머리 빗고 화장하고 올 게요.’ 했다가 욕만 얻어듣게 마련이어서 그냥 그 차림 그대로 마늘을 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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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마늘이라 아직 싹도 안 났고 알갱이가 또랑또랑하다. “용산댁네 마늘이 처마에 매달려 있어 걷어다 까봤더니 한 캥이도 안 남고 팍 곯아부렀어. 주인이랑 똑 같어.” “요샌 노인네 유치원엘 다니는데 새벽같이 가는기, 거 가면 아침밥도 묵이고 저녁밥까지 묵고 데불다 주는거 같드만.” “완존 바보가 되야서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깜깜한데도 처앉아 있드만.”


논농사도 밭농사도 이젠 다 끝났어. 논은 이장이 부친다고 갈아놓고 대밭 위 밭은 임실댁이 차지 했어.” 치매가 와서 주간보호 시설에 다니는 이웃 용산댁 일이 남 일이 아니기에 설명이 길어지는데, 수십년 앞뒷집으로 살던 정이 어디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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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댁이 자기네 밭에서 무 뽑아 갔다고 용산댁을 겨드랑 밑에 끼고 동네를 끌고 다녔는데... 그런 짓도 다 지 정신이 아니어서 그랬드만... 허지만 그깐 무 하나 뽑아 먹었는데 그 지랄 난리를 치고...” “ 유영감은 아침만 먹으면 논으로 나가. 밥도 하루 종일 안 묵고 깜깜해도 안 돌아온다꼬. 그 치매란 병이 세상 몹쓸병이라코 동네 걱정을 다하는데, 쯧쯧쯧...” 그래도 아줌마는 동네 소식을 내게 다 알려줄만큼 정신이 성하니 나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어제 성주간 월요일 복음: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딴 대목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11,5)는 좀 애매한 구절이 나오지만, 오늘 독서에서도 '그 여동생'이 사고를 친다. 잔치 도중 마리아가 비싸디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병째로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는 '풀-서비스' 장면은 화가들이 단골로 그리는 소재!

http://donbosco.pe.kr/xe1/?mid=SocialDoctrine&page=4&document_srl=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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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목에 우리 부끄럼쟁이 양승국 신부님의 묵상글은 "나라면 껄끄럽고 거북한 나머지 '걸음아, 나 살려라!` 줄행랑을 쳤을 겁니다."라는 말씀으로 우릴 웃겼는데, 복음서 그 대목을 읽는 나에게 보스코가 느닷없이 맨발을 쓰윽 내밀었다. “이 발 못 치워욧? 그냥 뎅강...!” 내 입에서 절로 나온 한 마딘 라자로네집 분위기와 사뭇 다를 뿐더러 (보스코가 예수님이 아니지만) 나도 그 여동생’ 노릇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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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느티나무독서회에 새로 가입한 청일점 남자회원 상균씨가 부인과 함께 휴천재를 방문했다.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 책이야기가 주류를 이뤘는데 그가 읽는 책의 종류와 취향이 우리와 같다보니 시국을 보는 눈도, 지향하는 세상도 비슷하여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가 사는 동네가 병곡 가는 길목에 있는 도천 마을. 바로 자기 이웃집에 남부도의 생가가 있다고 하였다. ‘조선인민당 함양군당위원장,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부사령관을 지낸 하준수씨 얘기다. 유복한 집안에서 일본유학을 하다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자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항일결사단체를 결성하고 빨치산 활동을 하다 부하의 밀고로 총살당했다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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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은 하씨 집성촌으로 큰 부자가 없이 다 고만고만하게 사는데 모든 부가 고루 나눠져야 한다는 생각을 어른들부터 갖고 계셔서 상균씨의 할아버지도 집에서 부리던 종들과 한상에서 밥을 잡수셨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인공(人共)시대를 거치면서도 주인집이 불타지 않고 대문간에 놓여 있던 그집 뒤주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음은 그 속에 민중과 나누어먹던 식량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 마을이라면 남부도 하준수라는 인물이 나올 법 자랑스러운 일이다. 지곡에서는 사람들이 시류를 잘 타서 고대광실 고택들도 남아있고 후손들도 출세해서 부를 누리는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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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점심 후 휴천재 뒤꼍의 대밭을 갈퀴로 청소했다. 그 동안 몇 해째 산죽을 쳐내고 오죽만 자리를 잡게 손을 쓰는 중이다. 산죽이 무성하던 곳은 오죽이 너댓 그루밖에 안 자라올랐지만 그 너댓 그루로 이층 마루 창문과 작은방 창문이 윗길에서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느라 요리조리 줄을 매는 모습은 대머리진 남자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칼로 요리조리 뒷머리를 감추는 치장 같아서 우습기만 하다.


금년에 보름달이 제일 크게 뜬다는 어스름에 텃밭에 구덩이를 파고 소똥 거름을 하고 호박씨를 심었다. 오후에 드물댁이 동네 아짐들에게 얻어다 준 맷돌호박씨앗을 오늘 중으로 기어이 심은 까닭은 저 보름달처럼 둥글고 넓적해서 맷돌 같은 호박이 주렁주렁 달리라는 바람에서다. 이스라엘에서는 닛산 달 보름 바로 다음 안식일이 파스카 곧 우리네 부활절이다. 평생 가장 쓸쓸한 성주간을 맞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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