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25일 화요일, 봄비


봄비 속에 깊은 산에서 녹아내리는 시린 강물 위에서 물안개가 하릴없이 장난을 치며 겨울잠에 취하여 물속을 들여다보는 버드나무를 흔들어 잠을 깨운다. 우리 앞산 와불산을 휘감는 구름도 산허리를 싸안고 맴돌다 난 몰라시치미를 떼며 능선너머로 치맛자락을 감추기를 거듭한다. 구름인지 안갠지 모르는 것들한테 속삭인다. ‘네가 오늘 한 짓을 난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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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네는 스무날 넘게 일당 75만원 하는, 08짜리 포클레인을 부려 휴천재 뒤에 있던 서너 마지기 논배미를 터서 850평짜리 커다란 논으로 다듬고 있다. 축대기술자 일당까지 하면 2천만 원도 더 드는 일이라고 자식들은 말리더란다. 하지만 자기 대가 끝나면 농사 지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이렇게라도 다듬어 놓아야 농지은행이라도 나서서 기계 농사라도 계속하지 않을까 싶어 이 공사를 했단다. 앞으로 몇 해나 농사를 지어야 이번 공사비가 빠질지 몰라 자기 하는 짓이 미친 짓 같다는 푸념에는 늙음에 대한 허망함, 아무리 몸부림쳐도 늘 그 자리던, 가난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그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일대에서 내가 본 가장 근면하고 뛰어난 농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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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제는 도정으로, 그제는 산복으로 보스코와 산보를 했다. 봄날처럼 날씨가 풀려 그를 걸리는데 안성맞춤. ‘황선생댁임시막사 칸막이들은 다 치워졌지만 그를 따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이 비닐로 쳐진 임시 막사 한켠에서 님이 오시나 내다보다 눈을 감았을 창문만 덩그렇게 철조망에 걸려 있다. 정말 ‘사랑으로 죽어간 모습은 늘 용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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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마을회관은 겨우내 밥을 해먹던 누릿하고 쿵쿰한 부엌 냄새만 남긴 채 할메들이 신발을 벗던 댓돌엔 귀 떨어진 고무신 한 짝 없이 휑하다. 가밀라 아줌마에게 전화를 해보니 도시 자손들한테도 오지 말라당부했고, ‘동네사람들 마을회관에도 모이지말라방송이 나왔고, 면에서도 각자 집에서 테레비나 보고 놀아라더니 노인일자리도 공공근로도 독거노인 반찬배달도 목욕봉사도 싹 없어졌단다.


인공시대(人共時代)’ 이후로 이 산골짜기에서 피부에 닿는 공포에 맨살로 다시 노출된 할메들은 나한테도 주의를 준다. “사모님도 타지에서 들어왔으니 보름 동안은 다가오지 말고 멀리서만 인사하시라.” 대구가 한 시간 거리요, 틀어놓은 TV에서는 하루 종일 신천지와 대구 얘기만 나오는데다 핸폰은 계속 공포스런 경보음을 날려 노인들을 더욱 소름끼치게 한다.


저 노인들은 한 때 휴천강에서 한겨울에 잡아올린 민물고기를 회쳐서 큰 양푼에 비벼 함께 먹고서 마을 전체가 디스토마에 걸린 일도 겪었다(전국 제일의 '디스토마 보균지역'이라고 신문에까지 났다). 그래서 보사부에서 가져다준 기생충 약을 단체로 먹으면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간 이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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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봉 작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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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소담정 도메니카와 용유담 윗길을 두어 시간 걷고 돌아왔다. 둘레길을 관리하는 이들이 산길 여기저기 나무 그늘에 맥문동을 심어놓았는데 포트에서 옮겨심은 것들이 뿌리가 내리기 전에 배고픈 산짐승들이 잎을 뜯어먹느라 뿌리채 뽑아놓아 우리 둘은 등산지팡이로 구덩이를 후벼파고 뿌리를 심어주면서 걸었다. 부디 살아남아서 번지면 좋겠다.


휴천재를 지나가던 구장댁이 나를 불러 지난 늦가을 밭구덩이에 묻었던 무를 캐놓았으니 쓸만큼 가져가란다. 가까이 있는 미루, 인천의 오드리, 식구 많은 이엘리한테 주려고 밀차로 '욕심껏' 실어와 깨끗이 손을 보았다. 이럴 때 택배가 있어 참 좋다. 아무리 세상이 흉흉해도 먹을 것을 나누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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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독서회 아우들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도서관은 물론이고 수영장 헬스장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모조리 닫았다니 외톨이로 지내라는 얘기. 나야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면 되고 보스코는 나만 곁에 있으면 온 우주가 다 있는 사람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책상 앞에서 똑딱거리며 지낸다. 누구 말마따나 엄마만 곁에 있으면 떼쓰지 않고 잘 노는 어린애 같은.... "이 사람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대사직 생활을 인터뷰해간 서울신문기자의 글이 오늘 저녁 인터넷판에 올렸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226017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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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서()를 마저 읽으면서, ‘이런 걸 끝까지 읽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다. 세기를 풍미한 문학가들이 하나같이 양다리 걸치는 바람둥이, 뻔뻔한 중혼자, 대담한 애정행각의 모험가, 철면피 로맨티스트로 살았고, 마약에, 성병에, 알콜중독에, 정신병에 찌들어 살다 간 사람들처럼 묘사되어 있다. ‘교미에 환장한 수컷들이야기만 읽다가 말미에는 엘리사벳 부라우닝이 고백하는 사랑을 하면 불가능도 가능하다는 말마디를 믿게 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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