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8일 월요일, 흐림


새벽 3. 집안의 문이란 문을 다 열고 습기 머금은 산 공기를 가슴 깊이까지 들여 마신다. 따그락따그락 고라니나 멧돼지의 식사중인 시간(어젯밤 찻길에서 우리 부부도 고라니를 보았다). 윗동네 문상 마을로 오르는시멘트 포장 도로에서는 발굽 있는 짐승들은 미끄러질까 긴장하며 불편한 걸음을 옮긴다. 걔들 눈에는 파아랗고 여린 풀이 소담스레 펼쳐진 초원이지만 구장님에게는 소중한 볏논이다. 물이 채워진 논이어서 처음엔 망설이다가 자주 입질을 하고, 그러다 보니 건너편 논둑이 조금 무너지기도 했다.


"고라니에게 출입을 엄금함!"

[크기변환]1562592399757.jpg


구장님도 속수무책으로만 당할 수는 없었던지 긴 대나무 장대를 옆으로 세우고 그 끝에 막걸리 병인듯 농약 통인듯 한 플라스틱병을 거꾸로 매달아 논길을 막았다. “저걸로 저렇게 막았다고 고라니나 멧돼지가 풀 뜯기(= 벼 뜯어먹기)를 포기한다면 걔들은 먹고 살 자격도 없겠다.”는 내 말에 보스코는 얼마나 먹을 게 없으면 저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까지 내려와 헤매겠어?”라고 한다.

내가 오늘 내려온다고 했더니 드물댁이 텃밭의 풀을 싸악 매놓았다. 내가 서울 가서 없어도, 꽃이나 채소들이, 엄마 없는 애들처럼 씻지도 않고 꺼칠은 하지만, 그래도 밥을 굶지는 않아 생명은 부지하니 다행이다. 데크 밑 화단에는 진이엄마가 물을 주고,텃밭이야 하느님이 물주신다.


[크기변환]20190708_120736.jpg


121350.jpg


[크기변환]20190708_121017.jpg 


점심상에 풋고추와 된장, 오이를 볶고, 브로콜리를 데쳐  나물로 올리니 시골생활은 밥상위에서 시작한다. 이른 봄 파종하여 옮겨 심은 아스파라가스는 제 키만한 잡초에게 휘둘려 크지를 못한다. (오늘 느티나무독서회에 상숙씨가 참석 못한 이유는 애가 다니는 학교에 학폭이 일어나 불려갔기 때문이라는데) 꽃밭에서도 아스파라가스만 안주인의 사랑을 받는다고 마가렛, 금국, 고들빼기, 산죽, 바랭이가 (초딩 1학년 교실의 학폭처럼) 아스파라가스 새싹을 집단으로 따돌림하고 있다. 나는 성난 학부모처럼 낫을 들고서 나머지 풀들을 몽땅 소탕했다. 지나친 보호일 듯 하지만 사느냐 죽느냐는 운명의 갈림길이다.


[크기변환]20190708_120853.jpg 


[크기변환]20190708_121028.jpg


서울집에서처럼 휴천재에도 능소화가 만발할 철인데 도무지 꽃이 안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작년처럼 하얀 벌레가 온통 꽃나무를 덮고 있다. 생김새는 흰꽃송이처럼 예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잔인하기는 저 커다란 능소화 모든 꽃송이를 다 베어먹었다. 나도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오늘 읍내 나간 길에 농약상에 들러 농약을 샀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종이란다.


[크기변환]20190708_160238.jpg

이 예쁜 꽃이 벌레라니! 

[크기변환]20190708_180542.jpg


어젯밤 편히 자겠다고 철가면을 벗고 잠든 보스코가 새벽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아 공부중. 그동안 철가면을 홀대하며 못하겠다고 그렇게 불평을 하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저런 도구를 안경처럼 평생 착용하고서 밤을 맞아야 하는 그가 안됐기도 하고, 이젠 제법 익숙해진 듯 해 안심이 되기도 한다.

7시 독서회모임에 갔다. 복효근의 시집 따뜻한 외면을 추천한 김차자씨가 오늘 당번이었고 배가 고팠던지 저녁 간식이라기보다 저녁 만찬을 준비해 왔다. 차자씨는 그 시집에서 타이어의 못을 뽑고라는 시가 특별히 가슴에 와 닿았단다


[크기변환]20190708_203443.jpg


타이어의 대못을 빼는 순간 차가 주저앉듯,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힌 채, 정비소로 가든 폐차장으로 가기까지 차는 굴러가듯이,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고 사는게 인생이라는 해설을 들려주었다. 혼자 남겨진 생이 많이도 힘 들었구나 싶은 소감이었다.

희정씨는 이녁이라는 시가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단다


...내가 먹은 것으로 

이녁 배가 부르고 

내가 본 꽃으로 

제 가슴에 천국을 그리는 사람


나를 스친 풀잎으로 

제 살갗에 피멍울이 맺혀 

내가 앓기도 전에 

먼저 우는 사람아


별똥별 떨어진 자리

또 한세상 같이 건너야 할 

무지개다리 하나 걸려 있겠다.


요즘 그미와 남편의 사이가 참 편하구나 느껴져 우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밖에 각자가 깊이 공감하는 시들을 읽고 얘기하는 시간으로는 두 시간이 짧다. 그미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는 밤길. 함양살이에 활기를 내게 주는 이 벗들이 있어 밤하늘의 별도, 반달로 커가는 달무리도 한결 더 아름다운 밤이다산길을 운전하며 어제 길을 가로질러가던 고라니 모습을 찾아보지만 더는 안 보인다


[크기변환]IMG_769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