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23일 토요일, 맑다가 비오고 눈내리고


어제 오후 늦게 미루가 와서 커피를 대접했는데 보스코도 곁들여 한 잔 마셨다. 그의 심장을 수술한 주치의가 보스코에게 당분간 카페인을 피하라고, 카페인은 혈관을 수축시킨다고 경고했는데, 커피향 유혹에 넘어가 4시가 넘은 시각인데도 마시겠다고 우겼다. 그러고서 오늘 새벽 4시가 넘도록 잠을 못 잤다. ‘떼쟁이같은 그의 요구를 들어준 내 죄가 더 크다.


눈쌓인 지리산 하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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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을 못 잔데다 오전내내 텃밭에서 바랭이풀을 괭이로 캐내 갖다버리고 채소밭을 정리하고, 드디어 20kg짜리 거름 푸대를 옮겨가며 배나무마다 한 푸대씩 뿌려주었으니 과로한 셈이다. 점심후 쉬고 있는데도, 심장이 강력한 항의를 하는지, 부정맥이 오고 켁켁거리면서 기운을 못 차린다. 민들레차를 뜨겁게 끓여 마시게 했더니 조금은 가라앉나 보다. 이젠 농사짓는 일도 무슨 수를 내야지 욕심대로 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우리 두 식구 먹으려면 열 평 땅이면 족한 푸성귀를 250평에다 일궈 고생고생 하는 나도 뭔가 다른 방도를 생각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소담정 도메니카는 그것도 안 하면 시골 살이에 무슨 재미냐?’고 하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다. 문정리 할메들도 겨울이면 마을회관에서 해주는 밥 먹고 다리 펴고 노는데도 평소보다 몸이 더 쑤시고 더 아프다니 밭일 논일이 할메들에게도 정신과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건 맞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 할메들이 비록 허리는 꼬부라졌어도 정신은 멀쩡하고 땅위를 기면서도 별탈없이 사는 걸 보면 육체노동이 정신건강을 일으켜세움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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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를 보고 너무 반가워 헐레벌떡 고샅길을 올라오던 드물댁. 그러면서도 뭔가 찔리는지 길가 꽃밭의 풀은 내가 오면 같이 매려고 아껴 두었다는 해명을 한다. ‘고맙고로~. 토요일에나 날씨가 풀린다니 그날에 나하고 풀을 맵시다.’ 했더니만 오늘 새벽같이 올라와 서재 뒷문을 두드린다. 우리 아직 식전이라니까 김 매고 있을 테니 어여 밥먹고 나와요.’ 보스코 땜에 나도 잠을 제대로 못 잤고 감기 기운도 도져 몸이 말을 안 듣지만 드물댁은 혼자서는 일을 안하는 사람이어서(놉일을 하더라도 누가 함께 해야만 움직인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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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카리가 피었다. 수선화 틈에 데이지를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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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꽃들이 잡초 더미를 젖히자 반갑게 얼굴을 내민다. 국화, 분홍 노랑 달맞이, 범의 꼬리, 파슬리, 구절초, 매발톱... 보스코는 터를 넓혀가는 바랭이를 포기마다 괭이로 캐내고 골을 내서 거름을 과수나무 뿌리 곁에 묻어준다. 두어 시간 일을 하고 허기진지 새참을 달래서 드물댁이랑 함께 새참을 나눴다. 드물댁 핸폰은 딸이 시간알람을 깔아주어 시간마다 큰소리로 '열씨~', '열한씨~', '열두씨~'를 외친다. 열두시 알람과 동시에 부리나케 드물댁이 사라진다. 마을회관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올 테니 교수님 점심 챙겨드리라는 말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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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최고령 할메가 외손주 장가갔다고 통닭튀김 열 상자, 딸기 다섯 상자를 마을회관에 내놓더니만 '자들, 잔치음식 먹었으니 부주들 내요!'라며 채근하드란다. 손주네 결혼 이바지를 내놓고선 부주금을 거두다니... 이름까지 대며 '무슨땍, 어여 돈내!'라며 챙겨 받는데 봉투는 내버리고 돈만 왼손에 뽑아들어 '딸네한테 누가 얼마 부주했나 봉투채 줘야 아는 거 아녀?' 해도 끄떡없이 자기가 챙기더란 드물댁 얘기


'예전엔 2천원, 3천원, 보리쌀 두 되... 그렇게들 냈는데... 2만원, 3만원, 5만원은 너무 불려서 받는다'고들 흉을 보지만 '검은골댁한테 통닭 한 접시 갖다주고 부주 받아와!'하면서 자기한테 부주금 걷는 심부름까지 시키더라나...


시골에선 하찮은 사건들도 두고두고 화제가 된다. 유노인이 이웃에 새집 지으며 뜯어놓은 목재를 난방에 쓴다고 가져가더니만 나머지 허섭 쓰레기를 태워준다며 동호댁 아래창고 옆 밭에서 태우다 거창하게 연기가 피어올라 인근 산불조심 감시원들이 모조리 몰려오고 불꽃이 번져 창고가 탈 뻔했단다


그런 불장난에 동호댁과 동네 여자들이 쑤군대자 "똥싼놈이 큰소리친다꼬, '글쎄 불나면 벌금이 나와도 내가 내고 창고가 타도 내가 지어줄 테니까 말들 마소!'라며 되레 큰소릴 지르더라니깐." 그래도 시골이라 남정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 아낙들은 입을 닫고 슬슬 자리를 피한다. 아침엔 맑던 날씨가 오후에는 소나기로 변하고 한때는 눈발이 쏟아지기도 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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