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8일 금요일, 맑음


어젯밤 급한 마음에 바로 서기도 힘들어 하는 엄마를 반은 끌도 반은 업고 3층 계단을 피난 내려갔다. 상황이 끝나고 승강기에 연기가 가득 차 있어 하는 수 없이 다시 그 계단으로 엄마를 모시고 올라왔는데, 그 피난살이에 어지간히 힘드셨던지 밤에도 서너 번 일어나 화장실을 다니던 엄마가 아침까지 내쳐 주무신다. 호천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지리산에 농사 지으러 가지 말고 맨나닥 엄마 훈련 좀 시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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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미사 중에 유무상통 담당신부님 말씀이, 2주전에 화생방훈련을 한 뒤라 실제상황이라고 해도 할머니들이 말을 듣지 않고 협조를 안했다고 나무라셨는데, 나중에 다리가 성하면서도 협조를 안한 노인들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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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말씀이 이 세상에 더는 기여하는 것 없이, 살아서 모든 걸 축낸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 줄 아느냐?’ ‘이젠 나도 죽어서 썩어 지금까지 나를 키우고 먹여 살린 것들의 먹이가 되고 싶다.’ ‘내 스스로 안될 때는 차라리 타의에 의해 다가온 죽음은 선물이겠다.’ 가이 도인의 경지에서 하시는 말씀 같이 들린다. 예전엔 늙은이들 죽고 싶다는 게 말짱 거짓말이라 했지만 제 정신의 노인에겐 그게 현실이라는 이모의 주장이다


이번에 와서 도우미 아줌마에게 울 엄마가 아직도 남의 집 현관 앞에 쌓인 신발을 차버리거나 갖다 버리고 숨기냐?’ 니까 대답을 안한다. 이모에게 울 엄마가 도로 착해졌나 보다고 하니, 하는 행동은 여전 하단다. 얼마전 하반신을 못쓰는 전직 의사가 3층에 들어왔는데 여러 사람의 긴 병을 고쳐주기도 하고 도움도 주었단다.




사람들이 울 엄마 욕을 하니까 그분이 '그렇게 욕하지 마세요. 그분은 지금 아파서 그런 거예 요.'라고 하더란다. 그러자 모두 자기들이 늙어가며 닥칠 증세 중 하나가 울 엄마에겐 신발에 대한 테러로 나타난다고 수긍하고는 더는 수군거리지 않는단다. ‘그렇구나! 어떤 사람의 실수를 그 사람의 아픔으로 보는 눈을 주시기도 하는구나.’ 감탄하였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각자의 나이에 맞는 신통한 생각과 유익한 말을 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어제 만난 체칠리아씨 다섯 살 짜리 손녀딸이 일곱 살 짜리 오빠에게 하던 말. 할머니가 늘어놓은 것 좀 치우라니까 '오빠야, 잘 치워야지 할머니가 힘들어서 가버리시면 우리 둘이 어찌할 건데? 할머니, 엄마 없으니까 엄마 대신으로 우릴 돌봐주시는 중이죠? 많이 힘드시죠? 그러니까 우리도 도와 드려야 하죠?' 다섯 살 짜리 고작은 계집애 마음속에 누가 요렇게 예쁜맘과 고운 말을 심어 주었을까?


로마에서 가까이 지냈던 정일언니가 수서로 이사온 지 일년이 다 되가는데 한 번도 못찾아 뵈서 박기원 배구감독의 부인 실비아씨와 성북동 성당 레지오 모임이 끝나고 함께 만났다. 서울에서의 오랜 생활에 친구를 그곳에 다 남겨두고 수지로 이사 온 형부도 외롭지 않게 함께 만나자고 했다. 형부는 올해로 90이 되셨는데도 꼿꼿한 모습이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다. 한때 세종호텔 사장도 하셨는데 운동모에 스포츠 구두로는 누구도 그분의 전력을 알 길이 없다. 다만 마음에 쌓아 놓은 인생의 결이 늙어서도 향기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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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가 다 되어 수지에서 소록도 떠났다. 늘 한번은 가보고 싶던 곳인데, 이번에 인연이 되었다. 400km가 다 되는 거리를 달리다 쉬다 피곤하면 한소금 자기도 했다. 가도 가도 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지칠 때쯤 어둠은 내리고 고흥을 지나 녹동으로 나와 소록도 다리를 건너면서 느끼는 이 싸하게 아린 가슴은 대체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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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한하운, "전라도길"에서)


오늘밤은 소록도의 천사 마리안느 수녀님이 수십년간 쓰시던 집에서, 그분 침대에서, 그분을 생각하며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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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바티칸도서관에 도착해서 공식일정을 시작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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