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7일 월요일, 맑다고 할 수 없는 맑은 날


항생제를 먹으면 몸이 붓고 숨이 가쁘다. 그러니 웬만하면 약을 안 먹고 주사는 더 피한다. 사흘치 약에서 하루치만 먹고 내 몸에게 '어디 좀 아파도 혼자 버텨봐!' 했더니만 엊저녁엔 정말 반란이었다. 누구는 이빨 빼는 게 애 낳는 것 보다 더 힘들다고 하더라는 큰아들 빵기의 말이지만 그 말은 애를 안 낳아본 사람들 말이고...’ 하며 얼음찜질로 달래며 약기운이 통증을 잠재울 때까지 견디느라 고생 좀 했다. 그런데 살만하니 그 통증의 기억이 다시 가물가물하다. 여자들이 애 날 때 고통을 잊기에 또 애를 낳는다더니, 이빨 하는 치통의 기억을 잊기에 치과의사가 먹고사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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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또 아플까봐 보건소에 가서 약을 지어 달라고 하니 이빨 열 개라도 빼고 남을 분량의 약을 단돈 900원에 지어 주었다. 그 많은 약을 보니 점심 안 먹어도 배부르다. 역시 시골인심이어서, 그렇게 많이 타온 약이어서 이 집 저 집 이웃들이 사이좋게 나눠 먹곤 한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농사일을 하고 비슷하게 축난 몸들이니 망가진 부위도 비슷하고 아픈 증세도 비슷해서다. 또 하나같이 옆동네 한남마을 보건소에서 타온 약이니 다리품이라도 아끼노라면 약을 오손도손 나눠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적당히 살다가 비슷한 나이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앞산 뒷산 적당한 빈자리에 자리 깔고 뗏장이불 머리까지 끌어덮고들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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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와 산보를 하노라면, 세상 떠난 아짐들이나 아재들이 평생 하던 그대로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를 바람결에 엿듣는 게 정겹기도 하다. 참 사는 게 별 것도 아니고, 모든 고통이 그렇게 저주스럽지도 않아 견딜 만하여 잘도 순응하다 가는 게 이곳에서 삶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보스코가 갑자기 오후에 김희중 대주교님을 만나봐야 할 일이 있다고 광주에 가잔다. 나야 기사니까 늘 대기 중이고, 떠나자면 떠나야 하니까 광주대교구청으로 한달음에 달려 도착했다. 보스코가 대주교님과 얘기 중이면 나는 의례 지하에 있는 바오로딸 서점에서 정겨운 수녀님들과 나누는 수다로 그 시간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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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이라는 꼬마가 첫영성체를 했다고 완도에 갔다 서울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녀님을 찾아왔다. 무심코 한 수녀님이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으니 신부님 되는 게 꿈이란다! 요즘처럼 재미난 일이 많은 세상에 얼마나 희귀한 대답인가!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아이에게 엄마 성소냐, 네 성소냐?’ 물으니 정확히 자기 성소란다.


우리 빵고신부가 세 살 때 말을 시작하며 품었던 그 성소를 한 번도 변함없이 간직했던 일이 기억나서 그 작은 아이의 장래에 축복을 보냈다. 좀 있다 서점에 내려오신 대주교님도 그 곁의 모든 사람도 한결 같이 걔를 위해 복을 빌었으니 이제 챙기는 일은 그분의 몫이다. ‘하느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녀석한테서 고삐를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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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담양에 들러 오랫동안 못 만난 성삼의 딸들수녀님들에게 들러 저녁 기도와 식사를 하며 새해인사를 나누었다. 찬밥과 고구마, 묵은지조림과 무조림과 멸치(유일한 고기), 날배추와 된장 고추장, 우리집 저녁 메뉴와 소박하기가 대동소이하다. 우리 귀여운 원장수녀님 말씀이, ‘식사는 가난하지만, 후식은 황제가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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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에서 돌아온 수녀님이 이바지로 가져온 한라봉, 우리가 가져간 빠네또네를 나눠먹으며 즐거워하는 자리여서, 수녀님이 얘기하는 그 황제는 아마 담양 고을을 다스리는 가난뱅이 황제, 교구청 앞마당에 꾸며진대로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워있는 저 황제, 그러니까 수녀님들만의 황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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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고속도로를 달려 60번 지방도로로 돌아오는 길. 로사리오에 우리의 사랑과 바램을 장미꽃 한 송이 한 송이로 엮어가는 동안, 제일 간절한 기도는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감사와 기쁨이어라! 이빨은 좀 아프지만 우리 대모님 말씀대로, 감동하고 감탄하고 감사하는 하루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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