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42_tmp_16c70ad7f74a43edb5dbe879d11671e44267view.jpgAugustinus, De beata vita 


아우구스티누스, 『행복한 삶


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16-12-25 










[책소개: 분도출판사] 


‘행복한 삶’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뿐 아니라 로마 시대의 일반 학자들도 즐겨 다루던 주제였다. 진리를 탐구하는 데서 행복을 찾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밀라노 근교 카시키아쿰에서 자신의 문하생들과 더불어 진리 탐구와 행복, 그리고 이 둘에서 이성이 지니는 역할에 대해 차례로 토론한다. 본서 『행복한 삶』은 진리 탐구의 개념을 다룬 첫 번째 대화집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에 이은 두 번째 대화집이다.
  『행복한 삶』은 근원적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을 대화로 분석해 보여 주는 책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를 얻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며, 한 인간에게 진리를 탐구하는 열망과 행복을 추구하는 동경이 존재한다면,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서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행복한 삶 -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만일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이미 참으로 행복하다면 그것을 추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와 결별하고 아카데미아학파의 회의론을 극복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문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행복한 삶』에도 이 방황의 과정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으로 식별하는 저 빛이야말로 최고로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마니교도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  그 사람들을 치밀하게 검토하여 따지고 나서 그들에게서 아주 탈출하였으며 ··· 온갖 바람과 맞서는 사이에 아카데미아학파가 풍랑 한가운데서 내 배의 키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나는 내가 믿을 북극성이 어떤 것인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관하여 사유할 적에 ··· 그분이 전혀 물체의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함을 각성하였습니다.(49쪽)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은 물적 존재이거나 진리와 유사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였고, 불변하고 영원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며,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영원성과 불변성은 참된 행복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누가 행복하기로 작정하였다면 항상 지속하는 것, 행운이 변덕을 부리더라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을 자기에게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73쪽)


그렇다면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이란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선 하느님을 모시려면 먼저 하느님을 추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추구하자면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은 어떤 사물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내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에 여기에는 내면을 탐색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정한 행복이 하느님을 모시는 데 있으며, 하느님 모심은 지혜를 얻는 데 달려 있고,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사유는 하느님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근거를 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소유할 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는 바를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가장 사랑할 만한 존재는 물론 하느님이었다.


행복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삶 전체에 걸쳐서 다루었던 핵심 주제 중 하나였고, 그것은 진리 인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밖이 아닌 안에서 찾아야 하는 진리였다.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 제대로 추론하는 모든 이는 진리 말고 어디에 이르겠는가?”(『참된 종교』39,72)


아우구스티누스가 참된 행복이라는 사유에 도달하게 된 과정과 그의 사상 편력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이라면 『행복한 삶』과 더불어 『아카데미아학파 반박』 및 『참된 종교』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책 속에서
  
우리끼리 연구한 것은 행복한 삶에 관해서였고, 우리가 청할 하느님의 선물 가운데 그보다 큰 선물이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까닭입니다. ···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내가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두려움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 지금부터 내가 전해 드리는 글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52-53쪽)

 내가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행복하다.’ ··· 나는 말을 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느냐, 이것 말고는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물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을 모신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할 것이다. 이 문제를 여러분은 어떻게 보는지 묻고 싶다’(73쪽).
  
정신의 빈궁, 그것은 어리석음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혜와 상반되고, 죽음이 생명에 상반되고 행복한 삶이 불행에 상반되듯이 중간의 무엇이 없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불행하고 죽지 않은 사람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지 않은 사람 모두가 지혜로운 사람임이 분명하다.(115쪽)

 누구든지 행복한 사람은 나름대로의 법도, 곧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지혜를 말하자면 하느님의 지혜 아니고 무엇을 얘기하겠는가? 우리는 신적인 권위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지혜 외에 다름이 아니라는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 하느님의 아들이 바로 하느님이시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 진리를 통해서 최고의 법도에 이르는 자는 누구든지 행복하다. 정신에게는 바로 이것이 하느님을 모시는 것,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들은 비록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다.(129-131쪽)



[서평: 평화신문]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 제시한 그 스승에 그 제자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668566&path=201701

 

분도출판사가 교부 문헌 총서 2권을 동시에 내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 행복한 삶과 암브로시우스 토빗 이야기이다.


행복한 삶(성염 역주)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진리 탐구 개념을 다룬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에 이은 두 번째 대화집이다. 386년 가을에 쓴 이 책은 근원적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을 대화로 분석해 보여준다.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에 참된 행복이 있음을 논증한다. 행복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삶 전체에 걸쳐서 다루었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참 행복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와 결별하고 아카데미아학파의 회의론을 극복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문했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물적 존재이거나 진리와 유사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였다. 또 불변하고 영원하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며,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선 하느님을 모시려면 먼저 하느님을 추구해야 한다. 하느님을 추구하자면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내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에 내면을 탐색하는 지혜가 요청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만이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모실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사유는 하느님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근거를 둔 것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