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과 그림자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그것을 퇴박 밑에 놓지 않고 동경 위에 놓습니다."
(마태 5.13-16)
 
 
간혹 상대방의 과분한 칭찬을 듣고는 머쓱하여 익살스레 겸양을 표하는 인사말을 듣게 된다. "뭘요, 제가 가진 것이라곤 미모와 재산과 학식뿐일 걸요…". 미모와 재산, 학식을 가진 이가 빛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좌절과 무의미, 그리고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짭짤하게 간 해주고 어둠에 싸인 사회를 밝히는 빛은 그런 사람에게서 오지 않는다.

 

그러면 소금은 어디에서 맛을 내고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참된 행복'이다. 오늘의 복음 바로 직전에는 그리스도 신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행복론이 나온다. 텔레비전에 클로즈업된 장안의 큰손 장영자씨나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와 영양 노소영 씨의 사진보다 저 쭈그렁 할머니 마더 데레사의 얼굴에서 행복이 보인다. 혼자만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 넘치는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이 느껴진다.

 

쇠고랑을 차고 재판정에 들어서기는 마찬가지인데 문익환 목사, 임수경 양, 문규현 신부와 박철언, 이건개, 장세동은 영 딴판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고난은 어떤 뿌듯함을 빛살처럼 전한다.

 

나의 책상에는 이탈리아 체르토사 어느 수도원의 그림이 한 장 놓여 있다. 일평생 봉쇄와 침묵과 은둔 속에 사는 시토회 수사가 흰 두건을 젖힌 채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그림이다. 그 그림은 며칠 전 중앙 일간지에 실린 전두환 씨의 얼굴, 경찰병원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는 학살자의 사진과 나란히 놓여 있다. 비교해 보라. 저 수사의 주름진 얼굴, 고독하지만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의 행복은 내 삶을 짭짤하게 간 해준다.

 

조선일보(96.1.24자)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 추켜세우는 이회창씨가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본인은 신한국당에 입당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의 강연을 듣고 "갑자기 눈물을 흘릴" 정도로 신앙심이 돈독하다 보니 "현재 나라가 어지럽고 역사 바로 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는 추기경의 말씀에 순명하여 입당했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는 보수 여당에 입당할 때도, 학살 정권에 입당할 때도 교구장의 명령을 따르는가 보다.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3,4,5,6공에서 꾸준히 승진하고, 마침내 감사원장에 국무총리까지 출세한 인물이 대통령과 한번 마찰한 후에 해임 당한 일로 일약 민주와 개혁의 기수로 둔갑하였다. 조선일보가 전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격려사에 따르면, 3김 청산의 대변자가 YS 밑으로 들어간 것은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결단한 "고난의 길"이었다!

 

오로지 정권을 섬기는 관기언론(官妓言論)의 놀라운 조작술을 지금 목격하는 중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민주화 운동의 어른으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한국 인권수호의 대변인으로 대접받는 일은 불안스럽다. 한국 언론의 저 교활함으로 미루어 지난 35년 간 관기언론에게 받은 찬사는 권력에 절하고 권력에 이용가치가 있는 찬사뿐이었다! 지금도 변함없다!

 

정국의 기로마다 추기경의 청와대 오찬이 있었고 그 장면은 개신교 목사의 조찬 기도회만큼 대서 특필되어 왔다. 왜 가톨릭이 보수 언론에 의해서 한국사회의 빛처럼 등장하는가? 혹시 개신교 수백 명 목회자들과 수천 명 신도가 도시빈민선교와 민중교회, 그리고 현실 참여로 겪은 고난과 투쟁을 희석시키는 고도의 언론 조작이 아닐까? 가톨릭(적어도 교계)은 궁극에 가서는 권력의 편이라는 세계사적 경험을 그자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96. 2. 4.: ㉮ 연중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