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레올(MISEREOR)
 
"저희가 가서 빵을 이 백 데나리온 어치나 사다가 

그들에게 먹도록 주라는 말씀입니까?" (마르 6,30-34) 
 
독일 천주교회에 미세레올(MISEREOR)이라는 주교회의의 산하 기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 국민의 속죄 의식이 가톨릭 교회에도 확대된 한 단체인 미세레올은 개발도상국의 교육 활동과 빈민운동을 원조해 왔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우리나라에도 그 혜택을 입은 단체가 한둘이 아니었다. 서울 교구 "한 마음 한 몸 운동"과 흡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미세레올이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다(misereror super turbam)"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 단체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될까?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 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매게 하니, 너희의 그 괘씸한 소행을 어찌 벌하지 않고 두겠느냐?"(예레 23,1-2)고 하느님의 심한 꾸중을 듣는 직업 목자와는 전혀 딴판이다. 밥먹을 틈도 없이 시달리는 사목자의 모습, 모처럼의 피정 기회마저 신자 사목에 빼앗긴 장면을 보아라.

 

하기야 사제관이든 본당 수녀원이든 식사시간, 기도시간, 회의시간이 따로 있어서 사목자를 면담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불평도 없지는 않다. 사목 위원들의 원만한 본당신부 '대좌'와 보잘것없는 노동자의 힘겨운 '알현'이 차이가 난다면, 치마바람 쌩쌩한 부인은 내집 드나들듯 사제관을 출입하지만 본당 신부님을 짜증나게 할 가난한 아낙네는 사무장, 수녀, 식간 아줌마의 인간 장막을 통과해야만 한다면, 거기서 착한 목자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물론 수많은 신자들에게 봉직하자니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는 변명도 얼마든지 이해할 만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교우를 사목할 때 말씀을 펴고 성사를 베풀고 신자들을 상담하고 소공동체들을 방문하는데 온 전력을 다한다면 말이다. 본당 살림, 서류 결재, 산하 단체들의 외적인 활동은 사목협의회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관리를 맡긴다면 시간은 충분할 듯하다. 사제직은 관리직이 아니고 사제의 권위는 돈주머니나 결재 도장에 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지난 수십 년 간 가톨릭 교회로 몰려온 그 많은 입교자들을 어떻게 교육시켜 왔을까? 당신을 찾아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은 무엇이 측은히 여기셨을까? 교리받고 세례받고 미사 참례한다! 그러나 성당에 오면 남편 출세와 자식 입학만 생각나는 기복신앙을 타파하는데 교회가 준 도움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언론과 반공교육으로 지새는 사회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민족통일과 화해를 얼마나 준비시켜 왔는가?

 

성당 크기나 화려함, 사목회의 구성, 주임사제가 가까이하는 부류, 강론의 성격으로 보건대 교회는 과연 맘몬 숭배자들을 하느님 예배자로 교육시켜 왔는가? 그리스도교 신앙 교육을 천년 동안 받고도 사회주의 교육까지 70년 받은 보스니아땅의 비극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르완다와 부룬디의 대통령을 폭사시킨 사건은 벨기의 음모인가 불란서의 음모인가? 그리하여 한 달만에 르완다 소수민 30만 명이 몰살당해도 전세계는 지금까지 구경만 하고 있다. 깜둥이들 씨가 마른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서구 사회의 양심에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했는가? 기아와 내전과 학살로 죽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가슴에 끓고 있을 분노가 우리는 두렵지 않은가?
(1994. 7.17: ㉯ 연중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