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법은 생기를 돕고...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게 하셨다."  (루가 4, I4-21)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도와주고... 주님의 법은 환하시니 눈을 밝혀 주도다." 층계송의 구구절절이 감칠 맛이 나는 사람은 복받은 신앙인이다. 그런 이와 나란히 앉아 층계송을 염하는데도 여전히 눈은 침침하고 그저 모래 씹는 기분으로 글따라 읽기에 바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첫 독서에 나오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법전을 들고서 울고 불며 춤추고 잔치를 벌이는 광경이 우리 눈에 설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의 설교를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는 말씀이 된다. 이 말씀이 너무 간결하여 조금 알아듣기 쉽게 풀이한 것이 오늘의 복음 그대로다. 하느님께서 기름 바르신 이가 오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 투옥된 사람들은 석방 통지를 받고, 눈 먼 사람들은 눈이 뜨이고, 억눌린 국민에게 자유와 민주가 주어진다. 하느님의 은총의 해가 선포되면서 지상에도 대사면을 선포하여 모든 죄가 사면되고 복권되고 복직되고 복학된다.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제 구미에 따라 뺄 것은 빼고 보탤 것은 보태어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도리가 아니다. 곰탕집에서 기름을 빼고 고깃국을 마시듯이, 오늘 복음에서 현실적, 인간적, 정치사회적 요소는 싹 빼 버리고 영신적이고 내세적으로 알아들으려는 것은 온당치가 못하다. 또 이 구절을 들어 남들을 메어치고서 자기는 무죄하다는듯이 손을 터는 일도 죄받을 짓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기를 주지 못하고 어디에 인용하기 위해서나 성경을 펴 드는 불손한 태도가 배었다면 거기에는 까닭이 있다.

 

강론을 시작하는 순간 성당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모두 사제에게 쏠릴 때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교우 여러분이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는 말씀이 귀에 들린다. '우리 귀'가 아니라 '내 귀'에 들려 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말고 이따가 말씀하소서." 하거나 "제게 말고 저 사람들에게 말씀하소서."라거나 "그 뜻으로 말고 이런 뜻으로 하소서." 라거나 "현 시국에 빗대지 마시고 영신적으로 하소서."라고 딴소리를 하는 바람에 그 말씀이 나를 회개시키지도 구원하지도 못하는 것 같다.
(l980.1.27: ㉰ 연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