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두고 누구를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요한 6, 61-70) 
 
결혼 생활 10년쯤 된 남편들 치고 "아내가 어떻게 되어 버려 팔자 좀 고칠 길 없나?"하는 악심 안 품어 본 사람 적다고 한다. 부인네들 중에서도 "저 화상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신세가 이렇지 않았을텐데"하며 찌들은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며 후회 안 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헤어지고 싶어도 자식이 딸려서, 저 인생이 불쌍해서, 정이라는 것 때문에, 사실 별볼일 없는 이 몸매, 이 나이에 가본들... 하는 생각에서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하고 우리 머리는 파뿌리가 되어 간다.

 

주일이라고 성당에 나오는 우리가 그리스도라 맺은 인연도 앞선 얘기보다 더 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주님의 요구가 까다롭고 짐스럽게 여겨지고 그이의 멍에가 뜨겁고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하고 뇌까리게 되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우리와 함께 세례받고 얼굴 익은 교우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가며 더 이상 예수를 따라다니지 않는 광경이 많지 않던가?

 

그럼에도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그치시는 주님 앞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엉거주춤 떠나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석유파동 이래 서울의 주식시세는 바닥 모르고 곤두박질이었다지만, 지금 세상처럼 그리스도께서 발행하신 신앙의 주식이 시세 없는 때가 다시 없다. 갈수록 폭락이다.

 

그런데도 더 손해보기 전에 실속을 차리지 못하고 그 주식을 손에 챙겨 들고 있는 것은 무슨 미련이 남아서인가? 꾸겨서 내동댕이치고 떠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와 슬그머니 도로 집어넣는 속셈은 무엇일까?(슈테판 안드레스의 글에서)

 

이유는 하나뿐이다. 지금은 헌 종이조각이지만 언젠가 한 몫 보겠다는 심산이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누구를 찾아가 본들 뾰족한 수가 없다는 계산이다. 그저 팔자려니 여기고 쓰나 다나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신앙이라고 더 화려하고 극적인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어 당신 나라에 거두어 주신다면 이유는 딱 하나일 게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도 인연의 끈을 못 끊어 이어지는 결혼처럼, 시들하고 짜증나고 힘겨워도 이것이 은총이려니 여기고 당신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따라다니는 그 정을 보아서 일 것이다. 조강지처는 버리지 못한다고 성경에 씌어 있다.   (1979.8.26: ㉯ 연중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