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다시 나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성령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 아무리 훌륭한 신학자도 변변한 답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바람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얼굴을 스치고 나뭇잎을 흔들 듯이, 아무리 초보적인 신자라도 성령의 효험은 느껴 알고 있다. 우리 눈에 무엇이 씌웠길래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에 평생을 묶이게 되었을까? 무엇을 보자고 이 아까운 일요일 가운데 토막을 끊어 성당에 나오는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순수히 받잡고 교회의 가르침과 법규를 고분고분 따르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인생철학을 실천하려고 애쓰게 된 경위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길래 우리 인생의 대사(大事)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희비애락을 교회에 맡겨 성사(聖事)로 도장을 받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우리가 신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령을 받아 마셔서"(1고린 l2, 13) 그렇게 되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그렇게 되었다.

 

주님과 3년을 함께 지낸 사도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못 알아보았다. 설교도 기적도 뜻을 몰랐다. 부활하셔서 못자국을 만지게 해도 긴가민가하였다. 그래서 주님도 "내가 가야 성령을 보내어 너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줄 수 있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l고린 l2. 3)는 사도의 말이 그런 뜻이다.

 

유다의 인텔리 계급 니고데모가 밤늦게 예수를 찾아왔었다. 그 지성인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다. 물만 아니고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 물론 세례받아 교적(敎籍)에 오르고 예식에 참례하며 신자 행세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고방식이 변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며 사람과 인생을 대하는 마음이 바뀐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새로 나게 만들 때에만 가능하다.

 

교회 축일은 지난날의 위대한 사건을 기리며 하루 푹 쉬고 걸게 한 상 차려 먹는 날이 아니다. 그날의 사건을 기념하고 다시 재현시키는 것이 축일이다. 따라서 성령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시지 않는 한 성신강림 축일은 뜻이 없다. 내려오셔서도 "믿는 이들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지 않으신다"면 뜻이 없다.

 

그리고 이 성당에 앉은 "모든 이가 성신으로 가득 차 하느님이 하신 큰 일들을 말하더라도" 나만 꿀 먹은 벙어리요 마음이 조금도 뜨겁지 못하다면 내게는 축일이 아니다. 사실 "성령의 빛 없이는 아무것도 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1979.6.3: ㉯ 성령강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