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힘을 얻어 이런 일을 하는가?"
"이 사람은 고작 장인이며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마르 6.1-6)
 
 
"너 사람아! 나에게 반항하는 역적의 무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그 낯가죽이 두꺼운 자들, 그 고집이 센 자들에게." 오늘 첫째 독서(에제키엘 2,2-5)를 읽고 있노라면 "하느님이 여간 심기가 불편하신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 원 참 하느님도 아무리 막말을 하시기로... 우리가 그토록 못된 놈이라면 구세주는 뭣땜에 보내셨는지요?"
하느님의 대답은 듣기에 더 거북하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도 않겠지만, 듣든 안 듣든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알게 하셔서 어떡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걸 구실로 삼아 우리 망하는 꼴 보시겠다는 건가요?"
"..."

 

두 주 전 한반도와 우리 민족의 운명이 파멸 직전에 다다랐을 때였다. 유난스레 덧니를 내놓고 웃는 카터씨가 평양을 간다고 했다. 카터씨는 박정희, 전두환씨가 독재하던 시절, 공화당과 민정당이 할아버지로 받들어 모시던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 카터 씨가 방북을 한다는데 이게 왠걸 청와대와 민자당과 관변 언론이 기막힌 반응을 보인다. "이 시점에 웬 방북이야. 저 사람, 김일성의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청와대의 반발에 순진한 국민들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스텔스기의 북폭, 북진통일이 눈앞에 와 있는데 다된 밥에 재 뿌려 놓긴가?" "하필 이름만 들어도 각하의 뱃속에서 밥알이 곤두선다는 동교동의 제안을 따라, 동교동이 천거한 인물을 보내다니 클린턴 제 정신이야?"

 

한국의 언론은 카터 씨의 방북이 한민족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집권자의 정적 김대중씨가  발상한 방북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떼같이 일어났다. 그들의 비판과 증오에 놀란 이라면 오늘 복음을 이해할 만하리라.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2,46). 이웃 가파르나움 사람 바르톨로메오가 일언지하에 말했다 하더라도, 사실 나자렛에서 인물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 고향을 빛낸 인물이 고향에 온다하여 온 나자렛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듣고 난 나자렛 사람의 반응이란 게 가관이었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목수가 어때서?
"에이, 기왕이면... 하여튼 맘에 안 들어!"
다른 패거리는 한 술 더떴다.
"저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뭐가 어때서?
"뭐랄까 애비가 없는 자식이지. 에이 처녀가 낳은 아들이라니..."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몰이해와 적대, 까닭없는 증오를 다른 사람도 아닌 구세주의 동향 사람들이 드러내다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 말씀이야 좋다. 허나 누군가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입에 올려, 만약 내 이익을 하나라도 가로막는다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법. 어떤 이에 대한 까닭없는 미움, 독재정권의 수십 년 사주가 그 이유였을까? 북한 사람에 대한 이유없는 증오감 , 정의니 민주니 통일이니 하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저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혐오....  이런 미움과 증오와 혐오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만 뿌리박힌 것이 아니다. 교회 전체에 두루 두루 뻗쳐 있음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 첫 독서에 나온 하느님의 역정도 이해가 된다. 바로 이러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속한다면, 이 민족이 전쟁의 재앙에서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큰 기적이요, 애오라지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아닐 수 없다.   (1994. 7. 3: ㉯ 연중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