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예술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요한 15.9-17) 
 
하느님이 사랑이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사랑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미물이 사람이다. 다만 사랑하는 모습과 범위가 제각기 다를 뿐이다. 정욕을 채우는 모습, 이익을 챙기는 모습, 희생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모습이 모두 다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예컨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예술 (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의 제목만 본 사람은 무엇을 연상할까? 어떤 이는 섹스의 기교와 체위를 담은 성애의 교과서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어떤 이는 기원전에 오비디우스가 썼다는 '연애 기법'을 떠올리며 이 책만 읽으면 여자 호리기는 끝내 주겠군 싶을 게다. 그런데 실제로 이 책은 철학적이며 영성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한 마디가 들리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내가 누릴 사랑, 상대방에게 내가 받을 사랑을 연상한다. 가정에서, 성당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사랑받기'를 배우고 익히지만 '사랑하기'는 좀처럼 배우지 못하는 듯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옳거니, 너희 모두가 죽어서 땅에 묻히고 썩어다오, 너희를 밑거름 삼아 내가 뻗어나고 자라서 30배, 5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둘 테니까…"

"어떤 아버지한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시지요. 저 따위 놈들이 들어가는 천당이라면 전 못 들어가겠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자기 죽어 남 살리는 사랑의 논리로 살고 죽으셨는데, 우리는 남 죽여 제가 사는 사랑의 논리로 살아간다. 밤낮 사랑을 설교하는 교회도 자기 방식대로 사랑을 한다. 이단자를 불태워 죽이고, 그 영혼이라도 천당을 보내야겠다는 기막힌 사랑이야 추잡한 중세의 이야기라고 하자. 교회 목전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참 교육을 외친다고 하여 가톨릭 방송국과 가톨릭 병원과 가톨릭 학교에서 사람들을 쫓아내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복음의 전파를, 자선 사업을, 가톨릭 교육을 내세우는 모습을 보았다. 제 것만, 제 자식만 품는 욕심많은 어미의 사랑 그대로였다.

 

접동새가 피를 토하며 울어대는 4월과 5월은 한반도에서 진정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배우는 계절이다. 제 처자식만을 사랑하여, 제 집단만의 권력을 위하여, 기득권자와 그 하수인인 경찰과 군부가 국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죄악의 달이다. 그 범죄자는 지금도 살아서 학살을 일컬어 "난세를 치세로 바꾸기 위한 거사였다"고 호언하고, "이제라도 같은 경우를 당하면 똑같이 행동하겠노라"고 권좌에서 공언한다. 아아, 대한민국!

 

또 있다. 4월과 5월은 부정선거와 독재를 규탄하며 학생들이 경찰의 무차별 사격을 뚫고 전진했었던, 광주의 학생과 청년과 시민이 대한민국 최정예 공수특전단을 상대로 맨손으로 싸우다 죽어 간 달이다. 민주, 정의, 자유가 무엇이길래, 무수한 젊은 혼들이 겨레더러 자기 몫까지 살아 달라고 외치며 산화했을까?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제주 4·3으로, 대구 의거로, 여순 봉기로 진달래 밭처럼 남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아아, 대한민국!   (1994. 5. 8: ㉯ 부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