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볼산과 해골산
 
"예수께서는 앞에서 모습이 변하였으니, 그 옷은 이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마르 9.1-9)
 
 
아브라함의 위대한 순종, 이유도 설명도 여유도 없이 내려진 하느님 명령에 입씨름도 불만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노인의 모습을 보라. 오늘 들린 첫 독서는 이렇게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사이, 평소에 걸치고 다니시던 칙칙한 삼베 옷은 "이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번쩍였다." 같은 얘기가 루가한테 가면 "당신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그 옷이 하얗게 번쩍였다"로 바뀌고, 마태오에게는 "그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고 또 다시 변한다. 베드로는 그토록 감격스러운 장면이 행여 끝날까봐 "랍비,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고 한 마디 한다. 그때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나누던 것은 무슨 얘기였을까?

 

마르코에는 없는 대화 내용이 루가에는 나와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바로 세상을 떠나가실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루가 9,31). 일찌기 제자들이 보지 못했던 이 신비경에서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과 나누시는 대화 내용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타볼산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골고타의 비참상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 타볼산에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그분이 며칠 뒤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이사 52,14). 빛나던 그 분이 애탄의 대상이 되리라고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그 끔찍한 사형장에서도 "랍비,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미치광이가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는가?

 

타볼산에서 골고타를 떠올리기 힘든데, 하물며 골고타의 참상에서 타볼산을 회고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더구나 골고타의 주님 얼굴과 닮은 꼴의 사람에서 타볼의 영광을, 하느님의 모상을 연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결국 우리는 다시 마태오 25장의 비유,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 중의 하나"와 "사람의 아들"이 동일하다는 신비에 직면한다.

 

사순절 십자가의 길을 돌며 "그 외아들 죽으실 때..." 노래를 부르는 우리의 콧등은 쉽게 시큰해진다. 하지만 정작 아들 딸이 경찰에게 살해당한 엄마, 가족이 군인에게 학살당한 광주 사람, 자식과 남편을 감옥에 넣어 둔 여자를 눈 앞에서 마주 대한다면 얼마나 심기가 불편하던가? 성모님의 통고는 그리도 안쓰럽지만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어머니의 서러움과 한에는 무감각하지 않는가?

 

사순절은 우리 생각과 말씨와 행실을 바꾸는 계절이란다. 하나 우리에게 사순절은 텔레비전의 연속극 보며 콧듯이 찡해지는 그런 감상과 다르지 않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하느님께 바치는 모습에는 깊이 경탄하면서도, 내 손아귀에 있는 것 좀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나오면 눈을 부라리는 우리이다. 노조, 운동권, 좌익, 전교조 이런 단어만 들어도 울컥 화가 치민다면, 소말리아의 참상을 뉴스에 보고 접하면서 사순절 단식과 금욕을 다이어트로 생각한다면, 북한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봉쇄와 경제 제재가 고소하다면, 우리는 분명히 '사고방식에 있어서 회개할' 처지이다.

 

여하튼 우리는 골고타에서 피투성이 얼굴을 하고 죽을 분이, 어째서 타볼산에 올라가 해처럼 빛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는지 알아듣기 몹시 힘들다. 타볼이 곧 골고타임을, 아니 해골산이 곧 타볼산임을 깨닫기란 우리에겐 거의 불가능하기만 하다.
(1994. 2.27: ㉯ 사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