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렛 예수의 권위 
 
"이게 웬일이냐?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마르 1,21-28) 
 
"그분은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필자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고개가 갸우뚱하다. 어떤 면에서 권위가 섰다는 말일까? 하느님의 아들이라서? 그분이 영원한 말씀이시기 때문에 가르침에 권위가 있으리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육화를 믿지 않는 이단자의 착각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어 여늬 사람 모양으로 드러나셨다."(필립 2,7)

 

그러면 어떤 기적을 행하시어 권위를 세웠을까? 오늘 복음처럼 악령 들린 사람을 당장 낫게 하신 기적이었을까? 저 광야에서 40일간이나 굶어,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먹을 것으로 보이던 바로 그 기회를 타 악마는 왔었다.
"이 돌들이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로 몸을 던지시오. 새처럼 사풋 내려 서 보시오."
그분은 거절하셨다. 그분은 어렵고 불쌍한 사람을 보다 못해 기적을 행하셨지 당신 권위를 세우자고 정책적으로 기적을 행하신 일이 없다.

 

그분의 권위는 우선 손에 있었다. 그 두 손은 펜촉이나 쥐는 서생들의 야들야들한 손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아버지를 여의고 목수로 다져진 못이 딴딴하게 박힌 손이었다. 가파르나움 회당이나 갈릴래아 호숫가나 산비탈에 모인 사람들은 그분의 검게 그을은 얼굴과 가뭄 논바닥처럼 갈라진 손바닥을 보고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분은 하늘같은 고위층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이 어렵게 사는 백성이었다. 부활하신 다음에는 더군다나 쇠못으로 뚫린 자국이 있었다. 어려운 이를 대신해서 그들을 위해 죽었다는 자국이었다.

 

그분은 예언자였다. 제관은 화려하고 위엄있는 제복을 입은 채 엄숙한 표정과 전례서를 읽고, 장중한 음성과 거창한 동작으로 권위를 세웠다. 율사는 성서를 인용하고 미드라쉬니 뭐니 하며 옛날 율법학자의 이름을 들이대며 권위를 세웠다. 옛 예언자들은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다!"라고 말끝마다 덧붙여 권위를 세웠다. 그런데 그분은 직설적으로, 단순하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 나를 따라오너라! 잠자코 그에게서 떠나가라!" 세상에 저런 식으로 말하고 명령할 사람은 예언자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소경으로 태어났다 눈을 뜬 무식쟁이도 심문관이 예수에 대해 물었을 때 "그분은 예언잡니다"라고 단언하였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경당 정면에 '최후심판'을 그릴 때 얄미운 성직자들의 얼굴을 단죄받은 사람의 형상에다 그려 넣었단다. 화가 난 성직자 양반들이 교황에게 항의하였다. 교황은 익살조로 대꾸하였다. "여러분 얼굴이 연옥에 있다면야 내가 은사를 베풀어서라도 구출하겠지만 지옥에 가 있다면야 내가 무슨 수로 끄집어내겠소?"

 

교회의 권위는 진리에서 나온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으로 권위를 세우던 자는 제아무리 모세의 교좌에 높이 앉아있었을 망정 지금은 역사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다. 진리와 교리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광경이 한국 교회라고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권위있는 분들에게 충언하고 싶다.

 

교회의 권위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는 데에 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대개 부유하고 힘있고 성공하고 잘난 사람의 편을 든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만이 그 반대편에 섰었다. 이 나라 민중, 더군다나 젊은이가 교회의 음성을 들으면서 이천 년 전처럼 "이게 웬일이냐?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라고 탄복하는 것은 그분의 교회답게 그분의 편에 설 때이다.
(1994. 1.30: ㉯ 연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