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높다란 창문에 회색이 물드는 것을 보니 먼동이 터오나 봅니다. 뼛속까지 아리던 추위도 느껴지지 않으니 주님, 드디어 자유가 발치에 와 있는 것입니까? 끈질기게 버텨내던 이 풀무가 색색거립니다. 몇 차례만 더 풀무질하고 멈추게 해주십시오.


주님은 골고타에서 높다랗게 전시되셨지만 나는 차디찬 독방에서 고독히 숨져 갑니다. 내 비명은 까마득한 저 담장을 넘어가지 못하였고 친지들은 쉬쉬하며 내 유골을 갖다 묻을 것입니다. 더이상 주님께 구시렁거리지 않겠사오니 가까이 계셔 주십시오. 주님이 필요합니다. 내가 졌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몸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은 채 죽게 해주십시오.

그 길고도 어두운 길을 내내 함께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긴 합니다. 주님만은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동지'이시군요. 한 사람을 독방에 몇 해고 처박아 놓는 계교는 가히 천재적입니다. 존엄성도 없고 무기력하고 추하고 비열하고 지독히 짐승다워집니다. 자유니 정의니 해방이니 하는 낱말들이 얼마나 바래지고 알맹이가 빠 져나가는지 아십니까? 압제자들, 간수들, 친지들, 심지어 내 자신에게까지 얼마나 응어리진 증오가 맺히는지 아십니까? 나의 품위, 내 나라, 내 겨레, 정의와 평화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주님 당신한테까지 얼마나 쓰디쓴 절망이 감치는지 아십니까?

증오와 절망과 오만에서 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힘도 없어진 것입니다. 창살 저 밖으로 희미하게 꺼져가는 별이 보이는군요. 고맙습니다. 당초에는 부정과 부패, 구조악, 검은 천사를 붙들고 싸운다고 생각하였는데 급기야 정신이 들고 보니 내가 붙잡고 씨름하는 상대는 주님이었습니다. 야곱은 고두리뼈만 퉁겨지고 축복까지 받았습니다만 내 꼴은 무엇입니까? 내 헛부른 패기를 깡그리 뭉개 놓으셨습니다. 검불을 재도 없이 살라 놓으셨습니다. 속 시원하십니까?

첫 햇살이 비치기 전 주님의 문간에서 이 몸이 서성이거든 주님 꼬임수에 빠져 신세를 이렇게 망친 나를 따뜻이 거두어 주십시오. 언제 내가 주님을 혁명가로 추스렸습니까? 입을 꽉 다물려고 했지만 주님이 뼛속까지 달구시지 않으셨습니까? 눈을 질끈 감으려 했는데도 그 궁상맞고 찌들고 피투성이 꼭뒤들 틈새에서 왜 주님 얼굴을 어른거리게 하십니까? 예레미야에서 요나까지, 겟세마니에서 칼을 휘두르던 베드로에서 안데스의 어느 수렁에 코를 박고 죽은 또레스 신부한테까지, 이제 보니 주님의 수작은 늘 똑같습니다.

 

이 땅에 유토피아가 서도 그게 주님 나라인 양 착각할 내가 아닙니다. 어찌 주제넘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보겠다고 나섰겠습니까? 그저 주님 가락에 장단을 맞추겠다고 날뛰다가 이 꼬락서니가 되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주님은 주님이 세우신 자 이외에는 다른 기준을 절대 용납 안하시지 않습니까? 구렁으로 이 몸을 들어가게 하시고 내 피를 흘리게 하신들 당신께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나처럼 어수룩하고 설치는 얼뜨기였기에 망정이지, 앞뒤를 조금만 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주님께 걸려들었을 성싶습니까? 내깐에는 내 자신에게나 사람들에게나 주님께 성실해 보겠다고 애를 쓴다는 것이 그만….

주님, 오죽잖게 못 살았고 난리 많이 겪고 땅뙈기 좁은 이 땅이지만, 내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 나라입니다. 모질게 이어온 이 겨레에 '참' 평안을, '참' 번영을 내려 주십시오. 삼대 사대가 가면 좀 잘살고 남부럽지 않고, 서로 위하고 마음놓고 사는 나라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눈에 저주스러운 꼴들이 많이 보이고 힘없고 먹을 것 없고 속속들이 수탈당하는 이들의 비명이 주님 귀에 들리더라도, 나 같은 얼뜨기들의 목숨을 거두실 망정 노하지는 마십시오, "내 조상들의 하느님이시여!"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모두 용서합니다, 내게 죽음을 불러온 세도 당당한 사람들도. 주님 팔이 내 연약한 이 팔보다 든든하고 아름이 큼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어찌 인정이 그리 쉽습니까? 이 땅에 정의가, 이 겨레에 참 해방이 오는 날을 못 보고 먼 산을 바라보며 숨이 꺼져갑니다.

이제 혼백이 나래를 펴면, 이 차갑고 둔하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주님 손수 마련하신 새 옷으로 갈아 입으리이다. 육체의 장막을 벗어나면 이 세계와 역사의 저 심장부로 스며들어 가리이다. 의미가 채워진 삶은 결코 개죽음으로 끝장나는 법 없다 하셨으니, 역사가 다하고 태초에 떠놓으신 거대한 작품을 펼쳐 보이실 제 이 몸도 핏빛 구슬 하나 되어 어느 귀퉁이에서 반짝이게 해주십시오. 내가 타고난 것과 가진 것은, 내가 드릴 것도 없이 벌써 주님 손에 죄다 들어가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는 내 혼백이 늘 맴돌고 감싸리이다. 늦가을이면 그들이 내 무덤에 철 늦은 국화라도 몇 송이 꽂고 짤막한 기도를 올려 주었으면 합니다. 비석은 말고 실거리 나무 한 그루만 묘 앞에 심어 주었으면 합니다. 주님이 흔적도 안 남게 짓부숴 놓으셨으니 명예 따위는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만, 잊혀지는 일, 이것은 내가 떨고 있는 제일 큰 공포입니다.

괴롭습니다. 순교자들이 목 잘리던 날은 분명 경사로운 명절일 수가 없습니다. 행여, 행여 주님께 믿음을 걸기는 하지만, 저 컴컴한 바닥 모를 구렁으로 떨어지는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입니다. 정말 저쪽 끝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겠습니까? 속는 셈치고 믿어 봅니다만 주님께 하도 크게 당한 끝인지라….

주님의 나라가 오십시오. 한시 빨리 오십시오.
새 하늘 새 땅이 오십시오.
드릴 말씀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주님께 너무 버티었습니다. 내가 졌습니다.
주님, 주님께 속은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1976.1.2)

(이 글은 1975년 4월 9일에 사법살인을 당한 소위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 

특히 여정남씨를 추모하여 쓴 글입니다

 

 [네티즌께 드리는 인사]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를 읽는 분들에게.

 

여기에 실린 글들은 1970년대부터 서울주보 등에 실었던 글이고 주일의 복음을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라서 당시의 주변 상황과 사회 현실에 비추어 묵상해 온 단문들입니다. 

전례시기 "가해", "나해", "다해"에 따라서 제1부에는 마태오 복음, 제2부에는 마르코 복음,  제3부는 루카 복음을 주로 음미하고 있습니다.

한때 초기의 글 일부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신앙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삼민사(1990)에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 1990년 이후의 글을 보태고 이탈리아 카푸친회 수사 칸탈라메싸 신부의 주일강론을 한 편씩 보충 첨가하여 제 칼럼집 첫머리에 다시 수록하였습니다. '성염교수 홈페이지'로 돌아가 '칼럼집'에서 "주일복음단상"을 따라 매주일별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