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 나눠 먹긴가?
 
"모두 풍족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가진 것을 모두, 곧 그의 생활비를 몽땅 던져 넣었습니다." (마르 12. 38-44) 
 
"아아, 대한민국!"


제2 행주대교가 공사 도중에 붕괴한 후 일 년도 안되어, 성수대교가 붕괴하고 스무 명의 시민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군산 앞바다 페리호 참사 후 일 년에 단양 충주호 유람선 화재로 서른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군사 정권 30년이래 이제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공공 건축과 토목사업에 지출된 공사비의 20%는 언제나 담당 고위층 및 실무 공무원, 그리고 유관 부서에게 바치는 뇌물로, 그리고 하청업자가 원청업자에 바치는 사례금으로 새어 나간다 한다.

 

최소한 2할을 떼먹힌 공사비는 필연적으로 부실공사를 초래해 와우아파트나 성수대교 같은 신화(?)를 만든다. '총체적 부정' 속에 갇힌 부실기업 대한민국을 인수하기 위해 온갖 변신을 주저하지 않는 김영삼 대통령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장사, 장사, 해도 하느님을 상대로 하는 장사만큼 이익이 많은 장사가 또 있겠습니까? 내면 내는대로 갚아 주시고, 헌금을 하면 열 배 스무 배로 갚아 주십니다." 성당에서야 이런 약장사 같은 설교가 들릴 리 없겠지만, 많이 드리면 많이 갚아 주신다는 속셈은 우리 모두의 심중에 숨어 있다.

 

이런 속셈은 하느님을 부모된 우리만도 못한 장사꾼으로 낮춰 보는 불경죄다. 자식을 낳아 기른 것은 자식을 사랑해서지 자식이 우리에게 잘해서가 아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배웠기에 우리도 자식을 돌보고 형제간에 의를 나눌 줄 안다.

 

주일미사에 헌금을 내는 것은 하느님께 배웠기 때문이다, 주는 마음을! 하느님은 우주를 만들고 내 생명을 주시고 당신 외아들까지 내주셨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 팔도 쬐금은 넓어지고 하느님 마음도 쬐끔은 배워서 뭔가 내놓을 줄 알게 된 것뿐이다. 내 수입의 일부나마 내어놓아 교회 공동체를 책임지고, 교회를 통해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생각이다.

 

십일조니 교무금이니 주일헌금이니 해서 하느님이 우리한테서 세금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다. 뒤로 들어온 봉투를 받은 공무원, 근로자를 괴롭혀 돈을 절약한 기업주, 고객에게 이익을 더 받아 낸 상인, 고리대금으로 거둔 이자에서 십일조로 떼어 바치는 사람은 도급액 1할을 하느님께 상납하여 입막음을 하겠다는 수작이기 십상이다.

 

필자가 아는 목사님은 부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교회수입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 몫으로 돌렸다. 그 목사 사모님은 여러 해 동안 친정에서 돈을 얻어다 살림을 해 왔다. 그렇지만 가난뱅이는 하느님께 벌을 받은 사람이라 믿는 부유한 장로들이 들고일어나 목사님은 쫓겨났다. 목사님께 나눔을 배운 교인 절반 가량이 그 목사님을 따라 나와 교회를 따로 차리기는 했지만.

서울 교구를 위시해 몇몇 교구는 본당 예산의 10%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방침을 정해 두고 있다. 과연 그 돈이나마 정말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는지 궁금하다. 이웃 본당 성당을 짓는데 아니면 이웃 본당 신부님 은경축에 사용하면, 혹은 절약도 좋지만 연말까지 자선비가 다 쓰이지 못하고 남아 있다면, 그것 역시 가난한 이의 몫을 훔치는 도둑질이 아닐까?   (1994.11. 6.: ㉯ 연중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