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밖으로 뻗어가는 포도 줄기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하느님은 여러분에게서 하느님 나라를 빼앗아
그 나라의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입니다." (마태 21,33-43)
 
 
쌀 농사가 기울면서 어느 해부터인가 추석이 가까우면 우리네 들녘에서도 포도거두기가 한창이다. 봄철에 사정없이 가지치기를 하여 말끔하게 뻗은 포도나무들이 밭고랑을 타고 가지런한 품이 성당에 나란한 장궤틀 같다. 알이 들 무렵 사정없이 솎아 냈고 물이 오르면서 종이 봉지로 고이 싸매 둔 송이송이가 검보라 빛으로 향기를 풍기어 주일미사에 착실한 신자들 모습이다. 이사야가 노래한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이사 5,1-7)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 듯한 이사야의 이 노래를 듣고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한국 천주교를 머리에 떠올리는 바보 있으면 손들어 봐! 아무렴, 이사야마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이사 5,7)라고 분명히 못박았으니까…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하여 하늘의 저주를 받은 유대인들, 히틀러가 씨를 말리다 만 유대인들이야말로 참포도 대신 들포도나 맺던 놈들이니 망해도 싸지! 우리는? 우리야 선업의 열매가 주렁주렁한, 주님의 포도가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들도 그리스도를 죽였다가 포도원 주인 하느님이 "가차없이 없애 버린" 이스라엘 민족임에 틀림없다! 그럼 우리는? 우리야 그자들의 손에서 포도원을 인수받아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충직한 농부들"이고 말고!

주님의 끝맺음 말씀,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는 구절을 듣고서 만에 하나라도, 한국 천주교가 내버린 어떤 짱돌이 감히 새 역사의 머릿돌이 되리라고 떠 벌이는 자가 있다면 저주를 받을진저! 그래서 성경은 자칫 미운 놈들 족치는 북채로 쓸 것이지 우리더러 회심하라는 징소리는 결코 아닌 성싶다. 하물며 주님의 사도들에게 감히 무엇을 깨우쳐 줄 요량으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여!

 

아무리 농부가 부지런하더라도 간간이 포도원 울타리 밖으로 뻗어나는 줄기가 있게 마련이다. 뻗어나는 순은 생명력의 상징이니까. 거기도 실한 송이들이 달려 있으면 나이 지긋한 농부는 담밖을 오가는 아이들이나 하다못해 들짐승이라도 목을 추기게 그냥 두리라. 담밖으로 삐져나갔다고 해서, 남이 따먹는 것이 싫어서 "싹둑 잘라 버려!" 하지는 않으리라.

하느님의 영이 바람불듯 자유자재임을 감지하는 분들이라면 복음과 교회라는 밑둥에서 수액을 함께 받는 이상, 제도교회 울타리 밖으로 뻗어 나간 가지라고 해서 "비공인단체"라고 하여 모조리 베어 버리지는 않으리라. 그래도 현자 가말리엘의 저 여유쯤은 마음에 품고서 "만일 이 사람들의 계획이나 행동이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망할 것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들을 없앨 수 없으리라."(사도 5,38-39)고 헤아릴 여유는 있을 것이다. 겨자나무 같은 교회라면 그 건물에 비공인단체가 깃들이지도 못하게 아예 쫓아 버리지는 않으리라. 하늘의 온갖 새들이 깃드는 품이라면, 날개짓이 좀 거칠다 해도 제 새끼들이 품속이라고 파고드는 것을 굳이 마다하겠는가? (1996.10.6: ㉮ 연중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