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맨’으로 줄서기
나의 세례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을 바지저고리 입듯이 편하게 물려받는 행사였다. 이웃이 불자의 옷을 물려 입고 먼 나라 사람들이 힌두나 이슬람의 옷을 물려 입듯이 고향 마을 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하신 할아버지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냥 물려받았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무렵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신 어머님이 루시아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돌아가시자 나도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물속에 잠김을 상징하는 나의 세례는 내 삶 전부가 하느님의 섭리 속에 푹 잠겨 살아가는 첫걸음이기도 하였다. 탁자에 올려놓은 유리잔에 담긴 물이야 마실수록 줄어 조바심이 나겠지만, 나처럼 교회가 품에 안고서 먹이고 입히고 키우고 가르치고 일 시킨 사람은 아예 물동이 속에 잠겨 있는 잔 같은 처지였는데 그러면서도 잠자고 숨 쉬고 걷고 웃는 “모든 게 은총”인지도 도통 모르면서 오늘까지 나는 살아왔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난데없이 주교황청 특임대사로 발령 받자 주변에서는 나에게 “노무현-맨”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세례를 받으면서 나는 “그리스도-맨”이라는 딱지가 붙은 교우들의 줄에 섰다. 그리스도의 얼을 받았으니까 그분과 운명을 함께 하는 일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그분의 십자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자렛 청년이 자기 민족의 성스러운 강 요르단에 들어섰듯이 나도 세례로 한겨레의 민족사라는 강물에 몸을 담가야 했다. 그 물에는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 반만년 동안 한반도에서 이루신 구원의 업적과 성령이 일으키신 현자들의 가르침과 겨레의 한 맺힌 고난과 서러움, 흥겨운 꿈과 노래가 녹아 흐르고 있다.

로마에서 바라보는 아시아 교회는 그리스도신자가 불과 인구의 3%밖에 안 되는 현실에서 온갖 사목적 대안을 찾아 분주한 목자들의 노고가 완연한 곳이다. 전 국민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전제되는 유럽이나 남미에서와는 달리, 우리는 이웃이 부처님과 알라신과 브라마를 섬김으로써 주님의 구원 섭리에 들어와 있는 “세례명 없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긴다. 불교와 힌두교와 이슬람에게 그리스도교가 성사가 되듯 이 세계종교들 역시 그리스도교에 성사가 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내가 예수님께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새삼 여쭙지는 않는다. 세례로 나는 이미 “그리스도-맨”으로 줄을 섰으니까.

[서울교구 주보 원고 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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