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을 바라보는 신앙인들의 눈

“테러와 탄저병의 나라를 위하여”

     대형 참사가 일어나고 여러 사람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을 적마다 로사리오 한 단을 바치는 일이 필자에게는 몸에 배어 있었다. 중국동포들이 밀입국을 시도하다 스무 명이 넘게 질식사한 소식은 고통의 신비대로 로사리오 다섯 단을 바쳐도 여전히 가슴을 에이게 했다. 그런데 지난 9월 11일 「뉴욕 사태」가 일어난 며칠 뒤 필자는 문득 소스라쳐 놀라며 신앙인으로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수천 명이 폭발로 죽어가는 장면을 텔리비전에서 내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그곳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한 주간이 넘도록 로사리오 한 단 바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 미국에 무슨 경원감을 품고 있었기에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신자다운 연민마저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가? 하느님께서 나의 양심을 샅샅이 뒤지신다면 나는 얼마나 두려운 심판을 받아야 할까? 그날부터 필자는 이 테러와 탄저병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은 저녁마다 텔리비전 뉴스에 생생하게 보도되어 전 인류가 구경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전쟁을 보면서도 로사리오는 한숨에 섞인 채 손가락 사이로 넘어간다. 페르샤만에서 쏘아대는 미사일, 펜타곤에서 직접 조종한다는 최첨단 무인폭격기, 상상을 초월하는 미국의 최신병기들, 특수부대의 엄청난 무장...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야 죽는 자들만 억울하겠지만 하느님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로서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전쟁행위에 대해 엄히 심판받을 것을 알아야 한다.”(사목헌장 80항)는 교회의 경고가 들려온다. 그리고 아프간의 병원과 민간마을 그리고 민간 버스를 겨냥한 폭격, 올림픽 경기장만한 땅에 풀포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죽이는 소이탄을 쏟아 붓는 폭격을 보고 있노라면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을 그 주민들과 함께 무차별 전멸시키려는 전쟁행위는 모두 다 하느님과 인간 자신을 거역하는 범죄이다”라고 선언한 경고도 들린다. “과학무기를 사용하는 전투행위는 막대한 무차별파괴를 가져올 것이며 이런 파괴는 정당방위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행위”(사목헌장 80항)라고 교회가 못 박았기 때문이다.

교황의 침묵과 교황청의 “정당한 전쟁” 발언

뉴욕 희생자들을 위해 로사리오를 궐한 것도 신앙인에게는 죄악이지만 아프간에서의 미국의 무차별살상을 컴퓨터게임처럼 구경하는 경우에도, 그곳에서 무죄하게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에 대해서 하느님이 나의 죄를 물으실 것임에 틀림없다. “너희는 내가 아프간 빈민으로 미국의 최첨단 무기에 의해서 폭격당해 죽어갈 적에 보고만 있었고 안쓰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은근히 통쾌하게 여겼다.”고 문책하실까 두렵다.

뉴욕테러 직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십자군 전쟁”을 외치자 로마 교황은 10월 3일에 “종교가 충돌의 대의명분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은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함께 폭력을 강력히 거부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정의와 단합을 발전시키는 인간애를 건설해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사태가 전쟁으로 치달을 우려를 낳자 10월 4일에는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여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이 교황에게 전화를 걸어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방세계가 아프간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적극개입해 줄 것을 요청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전 세계 지성인들과 이슬람교신자들이 안타까워하는 일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이 시작된 이래로 그리스도의 평화와 자비를 상징하는 인물인 교황이 미국의 군사행동을 직접 거론하지도 않았고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분노, 증오와 미움을 뿌리 뽑고 화해와 연대, 평화의 마음을 심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10월 11일)는 말씀으로 그쳤다.

더욱 통탄할 일은 교황청의 공식 입장이다. 교황청 국무원차관 또랑 대주교는 10월 12일자 인터뷰에서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정당하다. 미국의 군사행동은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발언한 사실이다. 물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교황청 국무원의 입장은 이번 전쟁이 9월 11일 발생한 테러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어야 한다.”고 단서를 붙였더라도 가톨릭교회의 공식입장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정당한 전쟁”으로 공인한 셈이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오사마 빈 라덴이 이번 테러의 주모자가 아니었고 아프간에 그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교황청의 이 입장은 미래의 교회사에 엄청난 부담으로 지워질 게 틀림없다. 이런 때일수록 화해와 용서를 주창할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 주교회의(의장 피오렌자 주교)마저도 미국의 대응은 빈 라덴의 활동을 종식시키기 위한 ”적절하고 신중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가톨릭 양심들의 호소

하지만 성령은 양식 있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중남미 가톨릭 주교 23명이 10월 23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정의와 연대, 평화를 위한 모든 민족의 외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행위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미국의 군사적 보복 역시 비난받아야 한다. 아프칸 공습 등 미국의 보복공격은 정의를 위한 외침이 부당하게 왜곡된 것으로, 민주주의. 문명. 그리스도교 문화 등을 표방하는 나라들에 의해 자행되는 또 다른 형태의 테러행위”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들은 “미국의 보복공격은 부녀자와 노약자를 포함해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내는 동시에 기아와 절망감을 증폭시켜 수백만 명의 난민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며 “보복공격은 중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에서도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정의구현전국연합 등이 “미국의 보복전쟁은 비록 테러를 응징하기 위한 목적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죄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불러올 또 다른 폭력의 악순환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항의하였다. 미국 내에서도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기구가 “미국은 우리를 해치기 위해 테러 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같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테러행위를 하고 있다.“고 아프간 공격을 비난하였다.

문제는 오사마 빈 라덴이 뉴욕사태의 주모자라는 증거도 내놓지 못한 채 아프간에 “오사마 빈 라덴이 은신중인 것으로 보인다”는 것만으로 미국이 아프간을 상대로 전면전을 행하는데 인류의 양심이 수긍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영국과 미국의 국제정치적 조작으로 2천년동안 살아오던 고향에서 쫒겨나 처참한 난민신세로 수용소와 난민촌에 모여 살기 50년이 넘는 팔레스타인들의 운명이 이 사건에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 정의가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려주는 것”(키케로)이라면 미국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살아갈 땅을 팔레스티나 땅에 마련해 주지 않는 한, 모든 것을 빼앗긴 팔레스타인들이 생존을 내걸고서 싸우는 억울함과 비싼 전폭기 한 대 값도 못나가는 땅에다 2000억불의 무기를 쏟아 붓는 미국을 비교할 적에, 미국이 내세우는 전쟁 이름, 「무한 정의(Justice Infinite)」가 노기어린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것을 빼앗은 자의 횡포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대구교구 주보 "빛" 원고 20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