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오빠, 사랑해요!"

 

 

오빠부대들의 “까닭없는” 사랑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 풍속 하나가 (연상이 아닌 한)여자가 남자친구나 약혼자를 부르는 칭호가 “오빠”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뿐이랴, 결혼해서까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다보니 시댁사람들이나 친정 부모로부터 면박을 당하는 일도 흔하다. H.O.T.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공연을 두고서 모여든 저 모든 열성팬들을 세칭 “오빠부대”라고 일컫는다. 스포츠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던 여중고생들이 난데없이 농구장과 배구장을 가득 메우고 기성을 질러대는 진풍경도 인기스타 선수들을 흠모하는 오빠부대들의 극성이다. 서태지가 무대에서 사라져 미국으로 가 있는 동안, “태지오빠의 팬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사이트를 만들고 음반과 테잎을 들으면서 오빠에 대한 추억과 사랑을 불씨처럼 꺼지지 않게 간직했었다.


발랄하게 커가는 처녀들에게 넘치는 에너지를 건전하게 발산할 창구가 전혀 없이 오로지 입시지옥에 잡아넣고서 부모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공부요 공부요 또 공부다. 교복에, 두발에, 외출과 화장에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못하게 단속하면서도 청소녀들에게 고유한 축제문화는 일체 마련해주지 않는 판국이라, 등교도 학원도 마다하고 류시원, 조상모, 서태지의 콘서트에 모여들어 “오빠 사랑해요!”를 외쳐대는 처녀들 모습은 젊음과 감성의 비상구가 막힐 대로 막힌 우리 사회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그러나 필자가 우리네 딸들의 이 문화현상에서 눈여겨보는 징후는 그 무수한 누이들이 가수든 선수든 한 오빠나 H.O.T. 오빠들을 사랑하면서도 서로 간에 시샘이 없다는 점이다. 그토록 샘 많을 나이에 소녀들은 이 멋쟁이 남자들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 가수 오빠가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소녀들은 한결같이 “기냥 좋아요!”라고들 대답한다. 애오라지 “예수 오빠”만을 쳐다보며 사는 수녀들의 숫자가 200만 명에 이르면서도 “오빠”를 두고 질투하는 일 없이 서로 북돋고 이끌어주는 종교현상을 여기에 비긴다면 어처구니없는 짓일까? 오빠부대의 치기어린 사랑에 어른들이 혀를 차면서도 욕하지 않는 까닭이나, 수녀들의 동정생활에 경외심을 품는 것은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기 때문이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리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까닭 있는 증오”

주의 기도와 성모송 다음으로 나에게 감미로운 기도를 꼽으라면 성프란치스코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평화의 기도」를 꼽고 싶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행동이야 근처에도 못가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성인의 염원대로 살고 싶어서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한국을 첫 번 방문하였을 적의 말씀이 기억난다. 교황은 한반도를 가리켜 동서 이데올로기와 남북 빈부문제를 가장 비극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땅이라고, 한국은 ”분열된 세계의 상징"이라고 탄식하였다. 그 가르침에 깨우침을 받아선지 몰라도 1988년에 이루어진 「천주교 사회사목을 위한 의식조사」에서 천주교 응답자 75퍼센트가 "교회가 민족통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대답한 바 있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는 남북한의 “평화는 용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용서와 사랑만이 평화의 강을 이루어놓는다”(1994)는 입장을 정립하였다. 천주교신자라면 국방력이나 국가보안법을 내세워서가 아니라 “용서를 무기로 하여” 북한사회에 대응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였다(1996).


머지않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할 것 같다. 남북화해에 대한 부시정권의 냉담을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도 풀지 못하였고 미국의 냉전정책에 편승한 남한 극우들의 총궐기는 차치하고라도, 필자는 김정일 위원장을 내세워 하느님이 신앙인으로서의 나의 속셈을 “까발리실까” 겁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를 바치며 가슴 찡해지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는 주의 기도를 미사 때마다 바치는 나의 입술이 진심인지 알아보실 겸 하느님이 김정일 위원장을 남한에 보내시는 것 같아서 두렵다. 작년 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때 온 국민이 감격하였지만 천주교신자인 야당당수는 사흘 내내 텔리비전을 꺼놓고 지냈노라고 기자들에게 대답했었다. 충현 교회 장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정일 답방을 저지하려고 자신의 정치적 기량을 총동원해왔다. 극우언론은 천주교가 “반공의 보루”인데 뭐하고들 있느냐고 충동질해왔다.


교황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나누어진 세계는 죄의 구조에 종속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사회적 관심 36항)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어느 천주교 신자가 “나는 우익이다, 너는 좌익이다.”하는 말을 발설한다면 그가 좌익이든 우익이든 하느님의 눈에는 죄스러운 이데올로기 구조에 예속되어 살고 있다는 자백이다. 진실한 신앙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 앞에서 내리는 결단은 현교황의 주장대로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선택"(사회적 관심, 41항)밖에 없다. 신앙인은 민족공동체나 인간보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울 권리가 없다.

마귀 들린 돼지 떼의 비유

철부지 소녀들의 철부지 사랑은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어여삐 보이지만, 어떤 사물이나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까닭이 있든 없든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적어도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왜냐하면 이 증오의 정체는 당사자의 마몬 숭배(“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마태 6.24))일 수 있는 연고이다. 우리 손아귀에 있는 것을 남과 나누지 않겠다는, 기득권이라는 마몬은 민족공동체를 배반하고 강자를 편드는 친일행각으로, 동포들을 대량학살하면서도 양심적 가책도 못 느끼는 반공과 친공으로, 몰염치한 지역감정 등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면서 신앙인들에게마저 가차 없이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까닭이다.


예수께서 게라사의 미친 사람을 낫게 하신 기적은 공관복음 세 편에 다 나온다(예: 마르 5.1-20). 그 사화에는 예수와 마귀들의 대화가 나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군단입니다. 저희 수효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 산기슭에는 사람들이 놓아서 치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더러운 영들이 예수께 간청하여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허락하셨다. 이에 더러운 영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니 돼지 떼는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달렸다. 이천 마리쯤 되었는데 모두 호수에 빠져 죽었다.


소련과 중국을 위시해서 전 세계에서 쫓겨난 이데올로기의 악마가 오갈 데 없어 한반도로만 몰려오고 있는 듯하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자주권을 찾으면서 제 살 길을 찾는데 이곳의 극우들만은 전쟁불사론을 향해 내리달리고 있는 것 같다. 개항기 한반도의 미묘하고 위태롭던 국제정치적 역학관계가 재현되고 있고, 미국의 군수산업은 그 엄청난 군수물자를 쏟아 부을 “저주받은 땅”을 찾아서 두리번거릴 만한데도 신앙인들마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상호주의를 내세우면서 한겨레의 절반에 대해서 증오를 부채질한다면, 우리의 입에 발린 「평화의 기도」는 어찌되는가?

[대구교구 주보 "빛" 원고 20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