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박물관 관광은 시스티나 경당에서 절정에 이른다. 로마생활 10여 년을 통틀어 적어도 30번은 들어가 본 곳이지만, 나에게는 유별나게 미켈란젤로가 이 방의 벽화들에 남겨 둔 장난기가 웃음을 자아낸다. ‘최후심판’에서 화가는 산 채로 가죽을 벗기운 바르톨로매오 성인이 자기 생가죽을 들어 보이며 주님께 심판을 호소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그 때 자기 얼굴을 순교자의 생가죽에 그려 넣었는가 하면, 그의 시스티나 벽화 작업을 유난히 방해하던 궁정장관을 지옥 밑바닥에서 구렁이에게 칭칭 감긴 모습으로 그렸다. 그러나 특히 웃음을 참지 못할 부분은 천장의 ‘천지창조’에 그려진 하느님의 엉덩이다. 서양에서 엉덩이를 돌려대는 짓은 상대를 놀려 주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그 밑에서 대제관과 율법학자들, 경건한 바리사이들이 희희낙낙하는 장면에 이르면-하느님의 무슨 솜씨인지-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속셈을 여지없이 드러내게 만들고 나서 그들을 비웃으시는 하느님의 장난기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오늘날 우리를 보자. 인도양의 대재앙으로 온 인류가 통곡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 어느 목사님은 저 재앙이 ‘힌두교도가 창궐하는 곳에 내린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설교를 한 것으로 알려졌고, 영국 켄터베리의 윌리암스 대주교는 “지상의 가장 가난한 백성과 무죄한 어린이의 떼죽음을 보면서도 내가 아직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라며 신앙인을 위로하는가 하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신앙의 시련을 ‘애덕의 시험대’로 여기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자고 온 인류에게 호소하면서, 1월24일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희생자 전부를 위한 연미사를 올리셨다. 15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대 참사 앞에서 우리의 숨은 생각은 어쩌면 이다지도 다를까?
오늘 듣는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도 마찬가지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울고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향유하며 웃다가도 분배 정의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이라는 교회 가르침에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들과 생각이 다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한반도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증오를 풀고 국가보안법을 폐기하자며 단식하였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곧 대한민국의 멸망이라고 외쳤다. 소위 네오콘 멤버들의 입에서는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주장이 거듭 나오고 심지어 중국이 북한을 침략하여 김정일을 제거하라는 기고문까지 세계 유수 일간지에 거리낌 없이 실리는 터에, 법률 하나가 어쩌면 우리 각자의 속셈을 이토록 빤히 하느님 앞에 드러낼 수 있을까?
[서울교구 주보 원고 20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