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주보 2005-01]

 

하느님의 초라한 크리스마스카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보석이 가득한 왕관을 쓰고 화려한 예복을 입은 임금님 셋이 낙타에서 내려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기 예수께 선물함들을 바치는 성탄카드! 필자가 연미복으로 성장하고 외교단석에 안아 참석한 바티칸의 교황님 성탄미사에는 어울리겠지만, 하느님이 원래 그리셨던 소박한 그림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카드다.

여드레만에 아기 할례도 하였고, 40일만에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러 갔다가 시므온 노인의 예언도 들었다니까 아기가 백일이 다 됐음직한데 성모님이 아직도 마굿간에다 기저귀를 널고 계셨다면, 점성가들은 자기네 눈으로 본 “유다인의 왕”의 처지에 기도 안 찼을 게다. 보다 못해 발다살은 손에 끼던 석돈짜리 금반지를 빼놓았고, 멜키올은 주머니에 넣고다니던 향낭을 내주면서 그거라도 걸어놓으면 마굿간 냄새가 덜 하리라고 귀뜸했을 테고, 가스팔은 탱자만한 몰약병을 아기엄마에게 건네주면서 이 고약을 아기 몸에 발라주면 부스럼딱지가 갈아앉을 게라고 일러준 게 아닐까?

점성가랍시고 먼지를 자욱히 뒤집어 쓴 채 예루살렘에 나타난 이방인들에게 예언서를 풀어 베들레헴이 바로 그 성지라고 일러준 대제관들과 율사들은 수천년 기다린 구세주가 태어났다는데도 왜 한 명도 따라나서지 않았을까? 저 소식에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면” 하다 못해 시민 한 명쯤 길잡이로 나설 만하지 않았을까? 헤로데는 그 흔한 첩자 한 명만 딸려보냈어도 감히 자기 왕위를 넘볼 구세주 후보자를 간단하게 해치웠을 텐데 “여우 같은” 그 머리가 왜 안 돌아갔을까?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하겠소”라던 구세주 경배가 굳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배기 그 아래 아이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학살이어야만 했을까?

하느님은 당신의 초라한 성탄 카드에 착한 목동과 이방인 점성가들 말고도, 예언서를 뒤적이는 성직자, 베들레헴의 역사적 사명을 떠벌이는 지식인, 혜성이 출현하였다고 열올리는 언론인, 텔리비젼 앞에서 술렁이는 시민들, 성지에 공수특전단을 파견하는 집권자를 죄다 그려 넣으시고는 그 중에 내 얼굴이 있다는 듯 나에게 의미있는 웃음을 보내시는 것 같다.

[서울교구 주보 원고 20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