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둑 같이 생긴 예수님 얼굴

 

 

컴퓨터의 예수님 얼굴과 “마돈나 네라”

     지난 4월 부활절에 즈음해서 전 세계 모든 신문과 우리나라 모든 일간지에는 그리스도신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이 실렸다. 영국 맨체스터대학 연구팀이 첨단 법의학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해 그려냈다는 “예수의 얼굴”이었는데, 우리가 보아온대로 백인에다 갸름하고 긴 머리카락에 콧수염과 턱수염이 가지런한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누구 말대로 꼭 소도둑놈 같았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있는 거룩한 염포,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라고 전해오는 천에 새겨진 얼굴 모습과도 너무 달랐다. 만약 예수님 진짜 얼굴이 저 사진대로라면 우리 중 상당수는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 되기를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상을 만드는데 부처님 신체의 특징을 열거하는 48상을 얘기하지만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기록이 없다. 엠마오 가던 제자들이 3년이나 함께 살았으면서도 길에서 만난 분의 얼굴을 못 알아본 사실로 미루어 그분은 어지간히 특징 없는 얼굴이었나 보다. 그런데도 우리 머리 속에는 나름대로 예수님 모습이 멋있는 도인(道人)으로 아로새겨져 있어서 저런 컴퓨터 그림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뿐이랴? 성모님이 까만 얼굴에다 고생고생해서 쭈글쭈글 주름투성이라고 해 보자. 남편 요셉 일찍 여의고 아들 일찍 출가해버려 먹고 사느라 논일밭일로 오리발처럼 거칠어진 두 손에 로사리오를 들고 계시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소도둑처럼” 못생긴 얼굴이 진짜 예수님 얼굴이라면, 그래서 어머니도 저런 아들을 낳을 만큼 못난 얼굴이라면 성모님을 쳐다보는 우리 기분은 어떨까? 우리가 믿기로 예수님에게는 인간 아버지가 안 계신다. 요즈음 과학용어로 말하자면 나자렛 처녀의 복제인간(複製人間)이셨던 셈이니까 인성(人性)에 관한 한 용모나 성품이나 마리아를 똑 닮았어야 옳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최초의 성모성화는 물론 멕시코 과달루페의 기적의 성화도 그러려니와, 폴란드에서 숭상 받는 “마돈나 네라”는 말 그대로 “깜둥이 마리아”다. 하지만 한국의 성모를 그려내는 화가들은 한결같이 미인도(美人圖)를 만들고 있고, 최근 명동에서 열린 어느 동양화가의 성화전시회에 가보니 제일 먼저 팔려서 딱지가 붙은 그림들은 한결같이 “예쁘디 예쁜” 성모상들이었다.

마리아님더러 기뻐하시라구요?

8월은 가톨릭신자로서나 한반도에 사는 한겨레로서나 마음 설레는 축일이 15일 하루로 모아져 있다. 광복절과 날짜가 같은 성모승천대축일은 마리아께서 한 많은 세상살이에서 해방되어 먼저 가신 아드님의 품으로, 성 요셉의 품으로 가신 날이기도 하다. 원죄없는 잉태, 동정녀요 어머니, 하느님의 모친, 승천, 또 우리가 성모호칭기도에서 드리는 그 많고 많은 존칭으로 보면 성모님처럼 부러운 분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로사리오를 염할 적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하는 첫 구절에서 항상 목이 멘다. 성모님처럼 한 많은 어머니가 없었는데 그분이 언제 기뻐하셨을까? 그분처럼 팔자가 센 분을 두고 “여인 중에 복되시다”는 말은 욕일까 칭송일까? 천사의 전갈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씀하신 순간부터 마리아의 평생은 보나마나 고생길이었다. 요셉이 거두어주지 않았더라면 요샛말로 “미혼모”에서 그치지는 게 아니라 아예 나자렛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었다. 호적 올리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타관에서, 그것도 남의 집 외양간에서 해산을 하였다. 밤을 도와 이집트로 도망가는 피난길에는 베들레헴 근방 금동이 은동이들의 난데없는 비명과 어미들의 통곡을 뒤로 남겨야 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서 홀어머니 버리고 떠나고서 뒤에 들려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불안하고 불길한 얘기들뿐이었다. “저 사람 목수의 아들 아닌가? 그 어미는 마리아 아닌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온다는 말은 없소!” 출신성분과 출신지가 애당초부터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저 사람은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 ( 그런 욕에 아들은 ”창녀와 세리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줄 알아라“고 맞받아쳤다나?) ”밥 먹으며 손 씻는 정결례를 지키지 않는다.“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 잡는다고 대꾸나 말 것이지. 집에서도 어지간히 안 씻었으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안식일이 사람 쉬라고 있지 사람이 안식일 지키자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대답은 사형깜인데....)

 

그 성스럽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탁자를 뒤엎고 채쭉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단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 또 웅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손가락질하면서 “저 건물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아 있나 봐라!”고 저주했단다. (베드로 대성당에 순례 간 신자들에게, 명동성당이나 계산동성당에 오는 교우들 앞에서 이런 소리를 질러대는 자가 있다면 우린들 고이 돌려보낼까?) 제관님들과 바리사이 어른들에게 “독사의 무리들아, 위선자들아, 회칠한 무덤들아!”하며 욕설을 퍼부었단다. 어딜 가나 좌충우돌한다는 소문이었다.


 

더구나 자기가 최후심판을 한다면 배고픈 사람 적선, 병자구완, 옥살이하는 사람 면회와 석방운동을 판결기준으로 삼겠다고 호언하여 선량한 신자들의 속을 다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그럼 우린 뭐냐? 세례 받고 주일미사 나가고 교무금 내고 판공성사 보는 우리만 병신이냐? 저 따위로 개나 소나 다 천당 가면 난 거기 안 간다.” (필자의 말이 껄끄럽거든 한 구절만 더 읽어 보시라. “그분은 가난구제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갇힌 이들을 풀어주기 위해 감옥을 찾아가신 일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수인도 석방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바라빠를 석방한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비록 거두절미했지만 10여 년 전 우리나라 어느 교구장님이 내리신 부활절사목교서의 한 구절이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이 당시의 독실한 신앙인들이 품고 있던 메시아 기준에 전혀 안 맞았다.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으로서는 빵점이었다. 저제나 이제나 제각기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은 이러 저려니 하는 생각을 따로 품고 있어서 그 기준에 안 맞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욕하고 배척하고 심지어 때려죽여왔다.

 

과연 모두 예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리아의 귀로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점지 받았던 자식이 한창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다. 머리위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출신지가 죄목으로 나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만큼 기막힌 모습이었다.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라는데, 억장으로 무너지는 어미 가슴에 아들은 더욱 기막힌 유언을 남기는 것이었다.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200주년성서번역). 그래서 승천하신 성모님은 천당에서 편히 쉬실만한데 지난 세기만 해도 루르드, 파티마, 라살렛, 메주고리 등 수십 군데에 나타나 눈물바람을 하시면서 인류의 운명을 챙기신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인지 몰라도 성모님은 승천 후에도 편히 쉬시지 못하는 것 같다.

[대구교구 주보 "빛" 원고 2001.8]